2023년 03월 06일 월요일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23 내 목숨을 걸고서, 나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렵니다. 내가 아직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24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기쁨을 누리게 하려고 함께 일하는 일꾼일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믿음에 튼튼히 서 있습니다.

 

1 여러분에게 또 다시 아픔을 주지 않아야 하겠기에, 나는 여러분에게로 가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2 내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하더라도, 나를 기쁘게 해줄 사람은, 내가 마음 아프게 하는 그 사람 밖에 누가 있겠습니까?

3 내가 이런 편지를 쓴 것은, 내가 거기에 갔을 때에, 나를 기쁘게 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에게서 내가 마음 아픈 일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기쁨이 여러분 모두의 기쁨임을, 여러분 모두를 두고 나는 확신하였습니다.

4 나는 몹시 괴로워하며 걱정하는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가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NASB

For if I cause you sorrow, who then will be the one making me glad but the one who is made sorrowful by me?(2절)

 

주석

1절 약속했던 두 번째 방문 대신, 편지를 쓴 것은 마음 아픈 일을 당할까 했기 때문이다. 그 편지는 바울이 몹시 괴로워하며 썼으며,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편지를 썼다(IVP 성경주석).

 

바울은 고린도에 가지 않기로 결심합니다(1절). 교인들을 아끼기에(23절), 또다시 아픔을 주지 않으려고 내린 어려운 결정입니다(1절).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인들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2-3절). 바울은 교인들의 믿음을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기쁨을 누리도록 돕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24절).

 

바울의 결심으로 인해 생기게 될 오해와 갈등은 자명했습니다. 자기변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진실한 고백입니다. 바울은 적당히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서로의 마음이 아프더라도 진실한 마음을 전합니다(4절). 나는 갈등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나요? 갈등을 회피하지 말고, 아프더라도 진실하게 마주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바울의 표현이 절절하다. 

심지어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해 보이기까지 하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속마음,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이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해받으면 다행이지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슬프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방문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단순변심, 갈등회피, 더 나은 전략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성도들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증인이 되신다. 

바울의 진심과 동기는 하나님이 아신다.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잃어버린 두 번째 서신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총 3번의 편지를 썼는데, 그 중에 두 번째를 잃어버렸고, 그 두 번째 편지는 매우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 편지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회개했으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바울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바울은 그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었다. 

마음을 열고 바울의 진심을 받아들이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첫 번째, 두 번째 편지도 눈물로 기도하면서 편지를 썼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걱정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문제는 이것이다. 

아무리 진심을 표현한다고 해도, 한 번 마음이 틀어진 사람들은 그 진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보다야 글이 조금 더 신뢰감이 가는 표현방식이긴 하지만, 한 번 글로 표현되면 여러 사람들이 읽으면서 비판의 강도가 더 강해질 가능성도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판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지 매일 매일 보고 있다. 

어떤 글이든, 어떤 말이든,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표현은 없다. 

누군가는 그 글과 말로 마음 아파하고 비난한다. 

 

과연 바울의 이 편지는 그 목적하는 바를 성취했을까? 

자신의 뜻을 밝히고 자신의 진정성을 호소하지만, 실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바울의 개인적 감정의 호소는 뒤로 감춰지고, 이 편지에 등장하는 몇몇 교리적, 신학적 단편들만 후대에까지 회자된다. 

편지로 교류하던 옛날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지만, 바울의 표현을 그대로 받자면, 바울은 정말 오랜시간 이 편지를 쓰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하고 에너지를 들이고 감정을 쏟아냈던 것으로 보인다.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한 글자 한 글자, 한 문단 한 문단이 곤욕이다. 

어떤 내용을 넣을지 말지를 계속 고민했을 것이다. 

마음 속에서 수정, 삭제, 보완이 끊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실제 글을 쓰는 순간에도 여러번 고쳤을 가능성이 있다. 

글쓰는 사람들은 그 고통이 어떤지 안다. 

특히 감정적으로 얽혀 있는 경우에는 더욱 조심스럽다. 

불신이 있는 사람들에게 쓰는 글은 지레 겁먹기 십상이다. 

 

바울은 원래부터도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예수파로 나뉘었던 고린도교회의 상황에서 그 어떤 파도 없고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어야 함을 강변한 적이 있다. 

바울이라고 해서 무조건 편을 들어서는 안된다. 

바울이라고 해서 무조건 절대적으로 맞는 것은 아니다. 

그도 인간이고 약점이 있고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집중되는 것이었다. 

파벌로 인해 교회가 나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울은 원했다.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나의 지금 마음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스스로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아무때나 양심에 손을 얹고 발언해서는 안된다. 

정말 진심인지 깊이 고민하고 몇번이고 돌아보고 고백해야 한다. 

스스로 속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많은 가면을 쓰고 사는 다중인격같은 사람들도 있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심이 아닌데, 진심인 척 할 수 있다. 

거짓이 반복되면, 내가 누군지 알 수 없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게 정말 무엇인지, 싫어하는 것이 무언지 헷갈리게 된다. 

진심을 숨기는 게 익숙해진 사람들은 꽁꽁 숨겨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뒤늦게 자심의 속마음을 공개하여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정치인들은 여러 가면 쓰기에 달인들이다. 

협상과 타협을 위해 그들은 스스로를 속인다. 

아… 진심을 표현하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지 누군가 진심을 다해 표현하는 것을 쉽게 믿지 못한다. 

악어의 눈물이라 비난하게 된다.

 

그저 하나님을 바라본다. 

나의 진심을 알고 계신 분은 오직 그분 뿐이다.  

 

바울이 느꼈을 절망감이 다가온다. 

세계 선교를 위한 그의 원대한 계획과 실천은 종종 진심을 표현해도 먹히지 않는 상황 때문에 더욱 힘들고 고되다. 

그게 사역자의 길인가? 

 

 

[오늘의 기도]

진심을 아시는 하나님,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헌신했던 지난 시간을 아시는 하나님, 

거짓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몸부림 쳤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 당신이 증인이십니다. 

진심을 다해 기도했고, 최선을 다해 만났습니다. 

나의 이익과 유익과 미래를 위해 전략적으로 만나기보다

한 사람의 유익을 위해,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만났습니다. 

그렇게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모든 순간 다 그랬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심의 순간도 많았음을 주님은 아십니다. 

그 시간에 대해서는 그 노력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인정해주시고, 칭찬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럼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04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푸소서.

 

15 이러한 확신이 있으므로, 먼저 나는 여러분에게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두 번 다시 은혜를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6 나는 여러분에게 들러서, 마케도니아로 갔다가, 마케도니아에서 다시 여러분에게로 와서,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서 유대로 갈 작정이었습니다.

17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변덕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또는, 내가 육신의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기를, '아니오, 아니오' 하려는 속셈이면서도, '예, 예' 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겠습니까?

 

18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동시에 '아니오' 하는 것은 아닙니다.

19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셨다가 동시에 '아니오'도 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예'만 있을 뿐입니다.

20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21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튼튼히 서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22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NIV

Now it is God who makes both us and you stand firm in Christ. He anointed us, set his seal of ownership on us, and put his Spirit in our hearts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21-22절).

 

주석

17절 ‘육신의 생각으로’ 계획하는 것은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쉽게 약속을 어기고 거리낌 없이 ‘예’를 ‘아니’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IVP 성경주석).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정된 계획을 변경합니다. 하지만 ‘육신의 생각’으로 계획을 변경하는 변덕스러운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습니다(15-17절). 바울은 신실하신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21절). 하나님이 약속에 신실하시듯, 바울 또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신실했습니다.

 

바울이 신뢰하던 이들의 비난에도 단단히 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자신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주십니다(22절). 이는 변치 않는 신실한 약속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고 있나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 앞에 진실한 태도로 굳게 서길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바울은 자신의 선택의 진정성을 보여주고자 애를 쓰고 있다. 

어찌보면 고린도후서는 교리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자신의 순박함과 진실성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고린도 성도 중 일부가 비판을 하기 때문이다. 

약속이 변경되었다. 

방문 계획이 있었지만, 여러 상황상 그 계획을 바꾸어야 했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른 방식으로 바꾼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고린도에 갈 계획이었지만, 그래서 그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상황이 바뀌어 어쩔 수 없이 변경한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바울의 속뜻을 의심했다. 

처음부터 갈 마음이 없었는데, 말로만 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변명으로 일관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속과 겉이 다른 것… 위선… 그건 예수님이 아주 강력하게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비판했던 지점이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에게 위선자라는 공격은 심각한 내적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자신이 버리려고 했던 위선적 바리새인의 모습을 누군가 지적한 것이다. 

바울이라고 마음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과 계획이 왜 없었겠는가!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특히 바울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 원래부터 있어왔기 때문에, 사실 방문하는 것이 달갑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감정이 들 수 있었던 것. 

그렇다고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재방문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정서상, 환영받지 못하는 공간에 가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엄격하게 돌아보았다. 

정말 내 마음 속에 “아니오”라는 마음이 있었는가? 

그 마음은 진실한 것이었나? 

말로만 “예”하고 속으로는 “아니오” 하지는 않았는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것이다. 

답은 아니오였다. 

비록 마음 속에 거리끼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욱 큰 마음은 고린도 교회에 가겠다는 마음, 가고 싶다는 마음, 가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속과 겉을 일치시키기 위한 오랜 노력의 결과다. 

예수님의 경고와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다. 

바울이 이런 진실성을 연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었던 바리새인의 삶을 청산하고 진심을 담아, 진실하고 신실하게 살아가겠다고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까? 

그 노력이 눈에 그려진다. 

매번 자신을 돌아보며,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양심에 비추어 예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단호하게 확신있게 예라고 말해야 한다. 

모르면 모른다고,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다고 정직하게 말하는 연습. 

애매모호하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말하지 않는 훈련. 

 

바울은 결국 이 모든 결정은 주님께서 주신 사명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계획이 변경되었다. 

단순 변심이 아니다. 마음의 오락가락이 아니다. 

하나님의 큰 계획이 있으며, 그 계획에 따른 사명이 각자에게 주어지고, 바울은 그 사명에 따라 계획을 수정했던 것이다. 

자신의 육신의 상황, 환경의 변화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생각하며 계획을 바꾸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가지 않을 생각인데, 말만 그렇게 했다는 비난은 과도하다. 

 

이렇게 한 번 관계가 꼬이면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과거에도 그랬겠지만, 현대 사회는 더욱 그렇다. 

정보의 공유 속도가 너무 빠르다. 

한번 깨어진 신뢰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과 말이 고깝게 들리고, 비판의 소스가 된다. 

복잡한 인간 심리를 생각할 때, 과연 진정성이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기가 두렵다. 

아무리 나의 진정성을 믿어달라고 항변해도, 한번 틀어지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느새 거짓말쟁이가 된다. 위선자가 되고, 이기주의자가 된다. 

진정성은 말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행동과 결과로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동안은 비난, 비판, 오해, 불명예를 참고 견뎌야 한다. 

정말 진정성과 진실성을 확보하려면 인내,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성과 신실성은 십자가라는 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권력가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때, 그는 죽음을 기다렸다. 

아무 말 없이 행동으로 자신의 진정성을 보여주었다. 

그렇지 않고는 사람들은 쉽게 믿지 않는다. 

많은 경우 속고 속이는 세속 사회의 본질에 혹사당했기 때문일거다. 

 

어제 말씀이 떠오른다. 

주님이 주시는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교인들을 대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겠구나 싶다. 

과연 나는 겉과 속이 같은 진정성있는 사람인가? 

그간 나의 노력은 과연 결실을 맺고 있는가?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인가? 

INFJ의 복잡함을 단순명료하게 줄여가고 있는가?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나를 분노케 한다. 

순곡선열의 정신을 이토록 왜곡시키다니, 그는 자꾸 선을 넘는다. 

편향된 외교로 적을 만들고, 단선적 동맹주의로 역사를 왜곡한다. 

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과연 그의 진정성은 어디에 있는가? 

한국인가 일본인가!! 

 

 

[오늘의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인류 구원에 진심이신 하나님, 

당신의 진심은 당신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그 진심을 저는 믿습니다. 

 

저도 당신을 닮아 더욱 신실하고 진실하게 하소서. 

복잡한 내면의 생각 때문에 제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주님, 정직하게 돌아보고, 솔직하게 말하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게 하소서. 

많은 사람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저의 주관과 생각을 몰래 감추는 위선적인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이 모순 덩어리 인간을 도와주세요. 

정직한 사람이 되게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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