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5 31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마스길, 고라 자손의 노래]

1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2 영혼이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니, 내가 언제 하나님께로 나아가 얼굴을 뵈올 있을까?

3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나를 보고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비웃으니,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 나의 음식이 되었구나.

4 기쁜 감사의 노래 소리와 축제의 함성과 함께 내가 무리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면서 장막으로 들어가곤 했던 일들을 지금 내가 기억하고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5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6 영혼이 너무 낙심하였지만,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님만을 그래도 생각할 뿐입니다.

7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폭포 소리를 따라 깊음은 깊음을 부르며,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파도의 물결은 모두가 덩이 되어 몸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8 낮에는 주님께서 사랑을 베푸시고, 밤에는 찬송으로 나를 채우시니, 나는 다만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9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께 호소한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를 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몸이 원수에게 짓눌려 슬픈 나날을 보내야만 합니까?"

10 원수들이 날마다 나를 보고 "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빈정대니, 조롱 소리 나의 뼈를 부수는구나.

11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목마른 사슴이 샘을 찾아 헤매듯, 시인은 주님을 목말라 합니다. 물이 없어 고통 받는 사슴처럼 시인은 주님이 없어 울부짖습니다. 사람들의 비웃음에 눈물은 더 깊어집니다. 과거 좋았던 시절,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장소로 들어가던 기억을 소환하니 가슴이 더 미어집니다(1-4절). 요단강 북부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길 사모하며 주님을 생각합니다(6-10절).

 

시인은 자신의 영혼에 명령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낙심과 괴로움에 빠져있지 말고 다시 주님을 찬양하자고 다짐합니다(5, 11절). 날로 커지는 세상의 조롱과 우리를 낙심하게 만드는 상황들, 우리도 내 영혼을 향해 외칩시다. 하나님의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 내 영혼아 하나님을 더 갈망하고 더 간절히 주님을 기다려라! 나는 오늘도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련다!

 

 

——

 

어릴적 노래 

 

시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로 정말 많이 불렀던 시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영혼이 주를 갈망합니다이렇게 시작하는 하는 찬양은 유년 시절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달래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했던 노래였다. 

생각해보면, 오랫동안 나의 가지 갈망과 열망은 주님을 깊이 알아가고 깊이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충분히 종교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다른 것들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채우려고 , 안에서는 나도 모르게 죄책감과 거부감이 든다. 무엇하나 깊이 빠지고 싶지가 않았다. 오직 나의 마음의 중심은 오직 주님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붙들고 있다. 연애인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여타의 다른 것들을 좋아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마음을 순결한 신부처럼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일종의 결벽증 같은 것이기도 했지만, 이것이 미래의 목회자를 꿈꾸는 어린 소년이 가져야 당연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농구를 좋아했고, 친구들과 교회에서 찬양하는 것을 좋아했다.

소위 말하는 세상의 즐거움은 가능하면 멀리하고 거룩함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것들만 산발적으로 좋아하려고 했다. 

너무 마음을 많이 빼앗기는 것을 약간 죄악시하면서 말이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덕후의 시대가 되었다. 덕질이 유행이었다.

무엇 가지 집중해서 놀라우리만큼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멋지게 보이는 시대가 되었다. 

덕질이라는 측면에서 나는 시대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마음의 기본 셋팅 안에 어느 정도 이상을 좋아하거나 깊이 매몰될 없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같다. 

신앙심이 깊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몰입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태도 때문이라고 해야하나 

모르겠다. 

 

공감

 

시인의 심성을 조금 닮았다고 느낀다.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갈망한다. 

그분의 임재와 강력하게 일하심을 갈망한다. 

게다가 최근에 교회가 조롱거리가 되어 여파로 하나님의 이름까지 먹칠 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마음이 찢어진다. 

정말 괴롭다. 

시인이 썼던 단어들이 있다. 

비웃다. 빈정댄다. 조롱한다. 

단언들은 지금 시대, 인터넷 상에 얼마나 그야말로창궐하고 있는가.

시인이 느끼는 낙심, 실망, 괴로움, 고통, 눈물, 뼈를 때리는 고통 

나도 그렇다. 

내가 가장 아끼는 , 내가 가장 사랑하는 , 내가 평생에 걸쳐 찬양하고 높여왔던  

그분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다름 아니라 바로 교인들의 죄와 실수와 욕심과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말이다. 

어렸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학교에서 교회다니는 때문에, 주일 시험보는 외고 입시 시험을 포기한 적이 있다. 

시험보기 싫어서이기도 했지만, 시험이 하필 주일이었다.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시험을 보러가지 않았다. 

그때 선생님의 표정이나 말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왠지 내가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이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이 난다. 

하지만, 때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 

때는 나름대로 정한_물론 교회 목사님의 영향이 지대했지만_신앙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이상하다는 세상의 평가를 견뎌야 했던 것이었던 반면, 지금은 교회와 기독인들의 잘못 때문에 주어지는 조롱과 질타를 견뎌야 하는 것이다. 

때의 나의 원칙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만드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교회가 보여주었던 행동과 선택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들이었다. 

그게 다른 점이다. 

하지만, 결국 욕을 얻게 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을 표현했던 그분이 욕을 먹는다. 

괴롭다. 슬프다. 

묵상을 위해 틀어 놓은 배경음악의 찬양 소리도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신앙을 지키기가 어렵다. 

사람들이 점점 떨어져 나간다. 부끄러운 기독교는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규모가 커서, 돈이 많아서, 이러저러한 사업들을 잘해서 자랑스러운 교회를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다. 

진실하기에, 사랑하기에, 이타적이기에, 조금 손해보더라도 사람들을 위해 살아하기에 자랑스러운 교회를 만들고 싶었다. 

목사로서, 오랫동안 찬양을 드려온 사람으로서 이런 꿈이 있었다. 

점점 꿈이 멀어져 가는 같아 슬프다.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 지금의 교회 현실이 아프다. 

 

 

그래도

시인은 낙심한 가운데도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있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마치 후렴을 반복하며 부르듯, 자신의 영혼을 진단하며, 그럼에도 하나님을 기다리고 바라기를 스스로에게 명령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다시 찬양하겠다고 다짐한다.      

태도 때문에 내가 여전히 목사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멈추지 않고 찬양을 부르고 싶다.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는 힘차게 그분을 찬양하고 싶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있는 최선으로 그분을 찬양하고 싶다. 

마음을 오늘도 깊이 인식하고 싶다. 그렇게 마음을 증폭시키고 싶다.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찬양하며 그분을 높이고 싶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 

나의 찬양을 받으실 분은 오직 뿐이시다. 

사람은 찬양을 받을 대상이 아니다. 사람은 격려와 칭찬과 사랑을 받을 대상이다. 

그러나 나의 찬양은 오직 그분께만 향한다. 

 

——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주님을 높이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간다고 해도 

주님을 찬양하는 일을 쉬지 않겠습니다. 

마음을 들여 주님을 높이겠습니다. 

마음을 모아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오늘 하루의 고백이 계속 이어지게 하소서. 

 

월요일의 피곤이 주님 안에서 풀어지게 하소서. 

주님을 찬양하면서 육체와 영혼이 평안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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