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4. 

 

[본문_요한복음 19:17-24_새번역] 

17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데로 가셨다. 그 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하였다. 18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아서, 예수를 가운데로 하고, 좌우에 세웠다. 19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 라고 썼다. 20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도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이 이 명패를 읽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 있었다. 21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 하였으나, 22빌라도는 “나는 쓸 것을 썼다” 하고 대답하였다.

23병정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그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서, 한 사람이 한 몫씩 차지하였다. 그리고 속옷은 이음새 없이 위에서 아래까지 통째로 짠 것이므로 24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찢지 말고, 누가 차지할지 제비를 뽑자” 하였다. 이는

‘그들이 나의 겉옷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다’

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정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 

 

0. 들어가며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너무 중요하고 기독교 최대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부활절이야 말로 모두가 기뻐할 최고의 날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요한은 부활보다 앞서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왕의 대관식이 일어났다는 관점을 알려주고 있죠. 어떻게 이런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 이것이 나의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명패와 왕의 대관식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는 다양한 사람들을 모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지중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매년 유월절이라는 민족 대명절을 맞아 순례길에 오르는 유대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찾아왔습니다.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함께 이 거대한 종교 축제를 경험하러 찾아왔습니다. 변방에 작은 마을이 순식간에 세계인의 melting pot(도가니)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언어가 공존했습니다만 그래도 공용어가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공식언어인 라틴어, 지중해 세계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혤라어, 그리고 유대 사람들의 히브리어(또는 아람어)를 공통적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셔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십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와 기소에 대해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너무 강력한 요구에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넘깁니다. 하지만 마지막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십자가형에 앞서 죄명을 쓴 죄패 혹은 명패를 붙입니다. 왜 사형시키는지 백성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전세계인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라고 썼나요? 그렇습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썼습니다. 지도자들은 못마땅했습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고쳐쓰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바꾸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심문한 그는 예수님의 범상치 않은 면모에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민중들이 예수님의 그간의 행적을 잘 알고 그를 메시야 즉 유대이의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빌라도는 전 세계인 앞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왕의 대관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2. 수치와 영광 

요한은 매우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 예수님의 영광이라는 관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광이라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과 환호 속에 휘황찬란한 장식과 성대한 예식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요한은 전혀 다른 방식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나간 뒤에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그렇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3:31-32)

 

십자가를 두고 예수님은 영광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에 요한은 십자가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패/명패를 씀으로써 전세계인에게 예수가 ‘유대인의 왕’임을 드러냈다고 해석했고, 그 내용을 자세하게 적고 있는 겁니다.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 가장 영광스런 순간이 되었습니다. 벌거벗겨져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참혹한 순간이 가장 영광스런 왕의 대관식이 된 것입니다. 수치는 여기서 영광이 됩니다. 금관과 곤룡포의 영광이 아닙니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낸 최고의 영광이 된 겁니다. 

 

3. 새로운 관점_수치 속에서 영광을 보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사의 어느 순간에나 드러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선수가 되어 우주인급의 실력으로 미친 승리를 이끌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칭찬과 환호를 보낼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움이며 뜻이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도 있겠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마 그런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을 겁니다.

 

그러나 승리의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패배의 영광도 있습니다. 닉부이치치의 삶이 그랬습니다.  '해표지증'이라는 유전질환으로 짧은 왼쪽 발을 제외하고는 양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없는 그는 친구들과 다른 자신의 모습에 실망해 어렸을 때는 자살도 시도했었죠. 그러나 그는 결국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호주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에 수치스런 순간이 없지 않았습니다. 남과 다른 자기를 보는 것이 부끄러웠겠죠. 인생의 패배자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수치는 이제 영광이 되었습니다. 생명과 평화가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4. 나가며_삶을 재해석하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이 한 가지 방식/양식으로 제한된다고 생각을 가두지 맙시다. 우리의 인생 전체를 다시 해석할 틀이 생겼습니다. 학창 시절 따돌림의 고통은 평생 따라다닙니다. 학폭의 기억은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그 자체의 고통과 아픔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수치스럽고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죠. 그러나 우리는 가장 큰 수치 속에서 가장 큰 영광을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슬픈 추억과 기억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빛 속에서 다시 새롭게 조명되길 소망합니다. 나의 고통과 슬픔이 어떻게 사용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아웃의 주인공 라일리가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쁨이’만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슬픔이’가 필요했죠. 영성 작가 헨리 나우웬은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책을 썼습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잘 도울 수 있습니다. 수치의 영광을 받으신 십자가의 예수님, 그 빛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재해석합시다. 부활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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