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6월 17일 토요일

 

여는 기도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피난처는 오직 주님뿐입니다.

 

37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38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자기의 스승과 같이 될 것이다.

41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친구야,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어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리해야 그때에 네가 똑똑히 되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ESV

...You hypocrite, first take the log out of your own eye, and then you will see clearly to take out the speck that is in your brother’s eye(42절 후).

 

주석

눈먼 사람 비유(39-40절) 여기서 요점은 우리가 올바른 길을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하기 전에 교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심판하면서 용서하지 않는 사람 

원수 사랑의 위대한 메세지를 던지신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랑의 구체적인 행동을 제시하신다. 

바로 남을 심판하지 말라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라이다. 

그리고 용서하라다. 

원수를 사랑하여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쉽게 남을 심판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될 것이다. 

심판과 정죄에 능한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 시대에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었다. 

무엇이 죄인지 아닌지 항상 율법의 잣대로 사람들을 심판하고 정죄했다. 

아쉽다, 서운하다가 아니라, 너희는 죄인이니 죽어도 싸다 등의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 모두가 죄인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는가? 

그런 포괄적 보편적 죄인됨에 대한 선포가 아니다.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죽을 죄인이라고 사적 심판을 내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류의 심판을 현대 사회에서 가장 잘 보여주는 집단이 검사들이다. 

검사들은 사람들을 항상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일단 의심하고 본다. 

의심해야 진짜 범인을 잡을 수 있다. 

이해가 된다. 

경력있고 능력있는 검사들은 아주 그럴듯이 속이는 지능형 범죄자들을 찾아내야 한다.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숨긴 범죄들을 찾아내는 데 명수다. 

이들은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기 마련이다. 

사회를 정의롭게 만드는 순기능을 갖고 있지만, 그 권력과 권한 만큼이나 무고한 사람들을 사법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는 집단이 바로 검사 조직이다. 

검사들이 구원을 얻으려면, 자신들이 법관이 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사람은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가 없이는 인간 관계를 유지될 수 없다. 

사랑은 용서의 총합이다. 

용서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의로 가득찬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베드로처럼, 레위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용서 받음의 과정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잘못과 죄가 미치는 영향을 차단하고 건강한 공동체와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를 전파하는 대리 통치자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하다. 

그것은 그거대로 의미가 있고, 따라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람에게 분노할 필요는 없다. 

죄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용서를 나누고,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 죄로 인해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망을 만드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사람에겐 용서가 필요하다. 

 

본문에서 “남”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1)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가? 

2) 아님 나와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가? 

내 판단엔 1)이 아니라 2)번에 가깝다. 

41절에 예수님은 남의 눈에 티는 보면서 내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문자적으로 볼 때, 남의 눈에 티를 보려면 매우 가까워야 한다. 

그리고 남을 “친구”라고 부른다. 

이로 볼 때, 예수님은 기본적으로는 인격적인 관계에서의 친구를 상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권력자에 대한 비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친구관계에서 더욱 더 적용될만한 말이 바로 “남을 심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인 것이다. 

 

생각보다 우리는 너무 많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심판하고 정죄한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는다. 

가족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친구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도 잘 하지 않는다. 

용서한다는 말도 잘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용서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비판하고 저주하는 것이 더 알아주는 능력이 되었다. 

용서는 순진하고 착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이제는 순진하고 착한 것을 무능하고 민폐적인 것을 여기는 풍조다. 

재빠르고, 약삭빠르고, 자기 것 잘 챙기는 사람이 유능하고 인정받는 세상이다. 

순박하고, 순전하고, 온유함은 위선적이라는 규정하는 분위기다. 

그러니 용서의 언어가 점점 사라져 간다. 

 

2. 위선자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없다. 

용서하지 않고 심판과 정죄를 밥먹듯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이 눈먼 사람들이다.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눈먼 사람들이다.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용서를 모르는 사람들을 이끈다. 

결국엔 둘다 구덩이에 빠진다. 

스스로 스승이라는 작자가 용서를 모르는 눈먼 사람이라면, 그의 제자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스승을 넘어서는 제자도 없거니와 다 배우고 나도 결국 스승 수준에 그칠 것이다. 

그러니 용서을 모르는 눈먼 사람을 스승을 둔 사람은 결국 그 수준에 머물 것이며, 결국 구덩이에 빠진다. 

용서를 모르는 사람을 스승으로 두지 말라. 

남을 심판하기 좋아하고, 정죄하기 좋아하고, 용서하지 않는 사람을 스승으로 두지 마라. 

결국 그와 자신도 구덩이에 빠질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남의 눈의 티는 엄청 잘 본다. 

그러나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잘 못 본다. 

“모두까기”라는 말이 있다. 

자신 외에 모든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용서는 잘 모르고, 비판만 아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을 스승으로 삼는 사람들은 구덩이에 같이 빠진다. 

부정한 권력에 대해 비판하라. 

불의한 권한에 대해 판단하라. 

그러나 주변의 사람들을 용서하라. 

그들의 잘못과 실수를 용납하라. 

 

모두까기가 되지 말고, 자신의 소명에 따라 까라.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 있을 것이다. 

그 소명은 현실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눈을 개발하게 만든다. 

소명이란 부족하고 왜곡된 현실을 바로 잡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그 현실을 보게 하신다. 

그리고 그 현실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심장에 부어주신다. 

그 소명에 따라 권력자를 비판하고, 그 소명에 따라 속한 공동체의 부족함을 지적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나머지는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납하라. 

비판에 중독되지 마라. 

비판에 중독되면 중독되어 있는 자신의 연약함을 잊고 무조건 비판하기 마련이다. 

이를 두고 예수님이 한 마디 하신다. 

“위선자야”

그렇다. 이런 사람이 위선자다. 

자기는 거룩하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모든 것에 능한 척, 모든 것에 선한 척 하나, 

그래서 부족한 사람, 연약한 사람, 실수한 사람, 잘못한 사람을 모두 비판하고 까내리지만, 

실제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은 쉽게 잊는다. 

 

본문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언제 누구를 비판하는 것은 허용이 되는지 의문으로 남는다.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논란이 있다. 

그럼에도 최소한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더욱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송청과 아벱에서 관계 맺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더욱 용서하고 사랑하고 싶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오늘의 기도]

용서를 명령하시는 예수님, 

하나님 나라는 용서의 나라입니다. 

용서가 없이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의 죄와 잘못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그리고 제 주변의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용서하게 하소서. 

주변의 친구들을 용서하게 하소서. 

용서를 해 본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자신은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는 어리석은 눈먼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관계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하루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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