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6월 17일 토요일

 

여는 기도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피난처는 오직 주님뿐입니다.

 

37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38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자기의 스승과 같이 될 것이다.

41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친구야,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어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리해야 그때에 네가 똑똑히 되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ESV

...You hypocrite, first take the log out of your own eye, and then you will see clearly to take out the speck that is in your brother’s eye(42절 후).

 

주석

눈먼 사람 비유(39-40절) 여기서 요점은 우리가 올바른 길을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하기 전에 교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심판하면서 용서하지 않는 사람 

원수 사랑의 위대한 메세지를 던지신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랑의 구체적인 행동을 제시하신다. 

바로 남을 심판하지 말라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라이다. 

그리고 용서하라다. 

원수를 사랑하여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쉽게 남을 심판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될 것이다. 

심판과 정죄에 능한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 시대에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었다. 

무엇이 죄인지 아닌지 항상 율법의 잣대로 사람들을 심판하고 정죄했다. 

아쉽다, 서운하다가 아니라, 너희는 죄인이니 죽어도 싸다 등의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 모두가 죄인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는가? 

그런 포괄적 보편적 죄인됨에 대한 선포가 아니다.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죽을 죄인이라고 사적 심판을 내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류의 심판을 현대 사회에서 가장 잘 보여주는 집단이 검사들이다. 

검사들은 사람들을 항상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일단 의심하고 본다. 

의심해야 진짜 범인을 잡을 수 있다. 

이해가 된다. 

경력있고 능력있는 검사들은 아주 그럴듯이 속이는 지능형 범죄자들을 찾아내야 한다.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숨긴 범죄들을 찾아내는 데 명수다. 

이들은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기 마련이다. 

사회를 정의롭게 만드는 순기능을 갖고 있지만, 그 권력과 권한 만큼이나 무고한 사람들을 사법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는 집단이 바로 검사 조직이다. 

검사들이 구원을 얻으려면, 자신들이 법관이 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사람은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가 없이는 인간 관계를 유지될 수 없다. 

사랑은 용서의 총합이다. 

용서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의로 가득찬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베드로처럼, 레위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용서 받음의 과정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잘못과 죄가 미치는 영향을 차단하고 건강한 공동체와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를 전파하는 대리 통치자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하다. 

그것은 그거대로 의미가 있고, 따라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람에게 분노할 필요는 없다. 

죄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용서를 나누고,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 죄로 인해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망을 만드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사람에겐 용서가 필요하다. 

 

본문에서 “남”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1)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가? 

2) 아님 나와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가? 

내 판단엔 1)이 아니라 2)번에 가깝다. 

41절에 예수님은 남의 눈에 티는 보면서 내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문자적으로 볼 때, 남의 눈에 티를 보려면 매우 가까워야 한다. 

그리고 남을 “친구”라고 부른다. 

이로 볼 때, 예수님은 기본적으로는 인격적인 관계에서의 친구를 상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권력자에 대한 비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친구관계에서 더욱 더 적용될만한 말이 바로 “남을 심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인 것이다. 

 

생각보다 우리는 너무 많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심판하고 정죄한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는다. 

가족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친구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도 잘 하지 않는다. 

용서한다는 말도 잘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용서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비판하고 저주하는 것이 더 알아주는 능력이 되었다. 

용서는 순진하고 착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이제는 순진하고 착한 것을 무능하고 민폐적인 것을 여기는 풍조다. 

재빠르고, 약삭빠르고, 자기 것 잘 챙기는 사람이 유능하고 인정받는 세상이다. 

순박하고, 순전하고, 온유함은 위선적이라는 규정하는 분위기다. 

그러니 용서의 언어가 점점 사라져 간다. 

 

2. 위선자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없다. 

용서하지 않고 심판과 정죄를 밥먹듯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이 눈먼 사람들이다.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눈먼 사람들이다.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용서를 모르는 사람들을 이끈다. 

결국엔 둘다 구덩이에 빠진다. 

스스로 스승이라는 작자가 용서를 모르는 눈먼 사람이라면, 그의 제자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스승을 넘어서는 제자도 없거니와 다 배우고 나도 결국 스승 수준에 그칠 것이다. 

그러니 용서을 모르는 눈먼 사람을 스승을 둔 사람은 결국 그 수준에 머물 것이며, 결국 구덩이에 빠진다. 

용서를 모르는 사람을 스승으로 두지 말라. 

남을 심판하기 좋아하고, 정죄하기 좋아하고, 용서하지 않는 사람을 스승으로 두지 마라. 

결국 그와 자신도 구덩이에 빠질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남의 눈의 티는 엄청 잘 본다. 

그러나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잘 못 본다. 

“모두까기”라는 말이 있다. 

자신 외에 모든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용서는 잘 모르고, 비판만 아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을 스승으로 삼는 사람들은 구덩이에 같이 빠진다. 

부정한 권력에 대해 비판하라. 

불의한 권한에 대해 판단하라. 

그러나 주변의 사람들을 용서하라. 

그들의 잘못과 실수를 용납하라. 

 

모두까기가 되지 말고, 자신의 소명에 따라 까라.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 있을 것이다. 

그 소명은 현실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눈을 개발하게 만든다. 

소명이란 부족하고 왜곡된 현실을 바로 잡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그 현실을 보게 하신다. 

그리고 그 현실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심장에 부어주신다. 

그 소명에 따라 권력자를 비판하고, 그 소명에 따라 속한 공동체의 부족함을 지적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나머지는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납하라. 

비판에 중독되지 마라. 

비판에 중독되면 중독되어 있는 자신의 연약함을 잊고 무조건 비판하기 마련이다. 

이를 두고 예수님이 한 마디 하신다. 

“위선자야”

그렇다. 이런 사람이 위선자다. 

자기는 거룩하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모든 것에 능한 척, 모든 것에 선한 척 하나, 

그래서 부족한 사람, 연약한 사람, 실수한 사람, 잘못한 사람을 모두 비판하고 까내리지만, 

실제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은 쉽게 잊는다. 

 

본문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언제 누구를 비판하는 것은 허용이 되는지 의문으로 남는다.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논란이 있다. 

그럼에도 최소한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더욱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송청과 아벱에서 관계 맺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더욱 용서하고 사랑하고 싶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오늘의 기도]

용서를 명령하시는 예수님, 

하나님 나라는 용서의 나라입니다. 

용서가 없이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의 죄와 잘못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그리고 제 주변의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용서하게 하소서. 

주변의 친구들을 용서하게 하소서. 

용서를 해 본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자신은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는 어리석은 눈먼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관계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하루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6월 16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27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

30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31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32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33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34 도로 받을 생각으로 남에게 꾸어 주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죄인들에게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36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ESV

But love your enemies, and do good, and lend, expecting nothing in return, and your reward will be great, and you will be sons of the Most High, for he is kind to the ungrateful and the evil(35절).

 

주석

원수를 사랑하라(27절) 예수님의 명령은 그리스-로마의 상호주의와 자선의 윤리를 거부한다. 그렇다면 인간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반응이나 보답을 위한 정치적·경제적 거래를 넘어서서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에 훨씬 가깝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 원수 사랑 

이 대목에 이를 줄 알았다. 

현대인들이 가장 하기 힘든 것 중에 하나다.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 

예수님의 평지 설교가 ‘가난한 사람에게 축복이 있고, 부요한 사람에게 화가 있다’로 시작되었다. 

가난한 사람은 오직 의존한 것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에 복이다. 

부요한 사람은 하나님 외에 의존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화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세상으로부터 고난받을 것임을 알려주셨다. 

그것도 다른 이유가 아닌 바로 예수님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 다음에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신다. 

이 대목에 이르면, 예수님이 이길도 저길도 막아버리신 느낌이다. 

하나님만 의존하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면, 당연히 핍박이 찾아온다. 

그때, 자신을 핍박하는 그 원수를 저주하거나 미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도리어 그 원수를 사랑하라신다. 

막다른 골목이다. 

그 길 밖에 없어 보인다. 

차라리 시편은 저주시라도 있다. 

그러나 평지 설교는 축복의 말, 기도의 말 밖에 대안이 없다. 

 

원수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원수에 대한 축복과 기도이다. 

과연 처음부터 이것이 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자신을 죽이려 하고, 모함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향해 축복을 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신다. 

예수님은 어떠셨는지 생각해본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날까로운 비판과 함께 욕을 하시기도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원수를 행해 축복도 안하고 기도도 안하셨다고 봐야 하는데, 이런 모순이 없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행동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은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위선자들을 향해서는 화를 내신다.(눅6:42) 

2)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로마 군인들, 유대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눅 23:33-35)

 

원수를 향해 복을 빌고,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그것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기대하셨고, 그것이 가장 큰 복이다. 

원수도, 모욕하는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으며, 예수님은 그렇게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도하신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는 잘못이 아무것도 아니거나 무시할 만한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도리어 원수들의 잘못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야 할 사람들을 막는 것이며, 이는 저주 받아 마땅하다. 

때로는 그렇게 비판하고 저주하는 것이 그들에게 복이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원수를 향한 축복과 기도의 기본적인 태도가 있으나, 그것의 표현은 다양했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지도자들을 용서하기 어렵다. 

유대인 학살을 명령했던 히틀러, 캄보디아의 식자들을 학살했던 폴 포트… 이런 사람들을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죽은 사람들을 내가 용서하고 말고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다만, 지금도 전쟁을 일으키는 전세계 지도자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지금까지의 생각의 끝엔, 결국 그들을 향한 축복과 기도가 자리잡고 있다. 

그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오면 참 좋을 한 명의 사람들이다. 

그런면에서 그들을 축복한다.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동시에 그들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기에 비판도 하고 욕도 한다. 

이 둘이 동시에 일어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구원받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위선에 대해서는 “독사의 자식”이라며 비판하고 욕하셨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단순히 기계적인 순종의 문제로 단순화 할 수 없다. 

원수를 위해 축복과 기도를 멈추지 말라. 

그렇다고 그로 인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간다면 과감히 비판하라. 

비판이 축복이 되는 경우다. 

 

가장 어려운 것은, 아마도 고통을 주는 가족이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지속적으로 고통을 안긴다. 

이런 원수가 따로 없다. 

이 경우에는 어떤가? 

과연 용서하고 축복하고 기도할 수 있는가? 

우리 영성의 시험대다. 

 

주님이 어려운 과제를 주셨다. 

 

 

2. 하나님의 인자

악인들에게도 인자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은 참으로 버겁다. 

그들에 대해 화를 내시고, 분노를 쏟아 내시고, 심판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훨씬 크다. 

인자하신 하나님보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더 좋다. 

사적 복수, 심판의 콘텐츠가 뜨는 이유가 이런 인간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당한대로 갚아 주고 싶은 심리. 

고통당한 것 이상으로 복수하고 싶은 심리.

인간의 자연스런 마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단다. 

고구마처럼 답답해진다. 

사람들은 사이다 하나님을 기대한다. 

신이라면 사이다지…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참으시는 분이신 것은 확실하다. 

한 두 번 참으로시는 것이 아니다. 

한 달 두 달이 아니다. 

몇십년 몇백년을 참으시는 분이시다. 

즉결심판보다는 기본적으로 참고 인내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즉결심판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웃사,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오래참으신다. 

 

구약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해왔다. 

예수님도 숱한 모욕과 고통을 오래 참으셨다. 

성령님도 지금 우리를 오랫동안 참고 계신다. 

 

조금 더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분노의 기제는 나의 성격과 경험에 따른다. 

내 기준의 가해자, 내 기준의 원수지, 완전 객관적인 가해자, 원수는 사실 드물다. 

내게 찾아오는 분노는 객관적 기준에 의한 분노가 아니다. 

심리적, 주관적, 감정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그러니 무턱대고 분노하는 것, 무턱대고 저주하는 것은 위험하다. 

 

게다가 나도 어느 순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실수 할 수도 있고, 잘못 판단하여 의도적인 죄를 지을 수도 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나도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가 될 수 있다. 

나도 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때,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자비다. 

그분의 인자다. 

 

그러니 바로 지금 하나님이 누군가에 대해 인자와 자비로 대하신다고 할 때, 너무 분노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인자와 자비의 기다림을 연습한다. 

심판의 때를 하나님께 맡긴다. 

잘못한 사람에게도 기회를 준다. 

돈을 못갚고 있는 사람 혹은 안갚고 있는 사람에게도 인자와 자비를 보여주고, 기회를 준다. 

쉽지 않지만, 그분의 인자와 자비를 닮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이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경우에라도 그분은 오랫동안 기다리시고 인내하시며 참으시고 인자와 자비로 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나에게 그런 기회를 주신 그분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시는 그분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자와 자비로 오래참으시는 그분을 찬양한다. 

 

[오늘의 기도]

어려운 요구를 하시는 예수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참으로 따르기 어려운 요청이십니다. 

그럼에도 그 말씀을 다시 마음에 새깁니다. 

원수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들의 회개와 회복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비록 나와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박수칠 것입니다. 

주님,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게 살던 저를 자비의 마음으로 기다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자비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변화되는 역사가 있기를 소망하고 간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07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5 누가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면, 실은 나를 마음 아프게 한 것이 아니라, 과장하지 않고 말해서, 어느 정도는 여러분 모두를 마음 아프게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6 여러분 대다수는 그러한 사람에게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습니다.

7 그러니 여러분은 도리어 그를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짓눌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8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어 보이기를 권합니다.

9 내가 그 편지를 쓴 것은, 여러분이 모든 일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여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10 여러분이 누구에게 무엇을 용서해 주면, 나도 용서해 줍니다. 내가 용서한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여러분을 위하여 용서한 것입니다.

11 그렇게 하여 우리가 사탄에게 속아넘어가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속셈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NASB

Therefore I urge you to reaffirm your love for him(8절).

 

주석

5-7절 학자들은 이 사람이 고린도전서 5장에 나오는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에 대해 논쟁한다. 그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다시 한 통의 서신을 써서 그 사람을 징계하라고 명했다(IVP 성경배경주석).

 

그 사람은 바울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 전체를 아프게 했습니다(5절). 바울은 징계를 받았던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짓눌리지 않도록 그를 용서하고 위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7절). 고린도 교인들이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기 때문입니다(6절). 용서는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그리스도인의 방식입니다(8, 10절).

 

악은 용서와 사랑이 없는 틈을 타서 분열을 일으킵니다. 악이 속삭이는 곳에는 지나친 분노와 짓눌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화해를 가져오셨습니다. 십자가는 용서와 사랑으로 분열을 잠재우고 악을 몰아냅니다. 한 사람을 돌이키기 위한 징계도 필요하지만, 목표는 화해입니다. 악이 나와 공동체에 틈타지 못하도록 용서와 화해의 삶을 실천합시다.

 

[오늘의 묵상]

세계를 다니며 숱한 어려움을 극복했던 대사도 바울,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신구약을 넘나들며,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동시에 고려하며, 체계화하고 조직화한 신학자 바울, 

왠지 그는 마음이 아프다, 슬프다 등의 정서적 반응을 보일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바울은 마음을 다루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마음을 다룰 뿐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마음이 이어져 있음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교회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은 바울 한 사람의 마음만 힘들고 어렵게 한 게 아니다. 

모두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다. 

공동체는 마음으로 이어져있다. 

공동체 구성원의 아픔은 모두의 아픔이다. 

공동체 구성원의 죄는 모두를 고통스럽게 한다. 

바울은 이런 마음의 연결됨을 인지하고 있다. 

 

용서는 이 시대의 단어가 아니다. 

현대 사회는 용서보다 정의가 앞선다. 

일면 온당한 측면이 있다. 

바른 정의가 세워지지 않고서 용서가 있을 수 없다. 

잘못이 무엇인지 바르게 규정되고, 잘못한 사람이 분명하게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할 때, 우리는 용서할 수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용서의 단어의 풍부한 의미와 용서 주변의 다양한 과정과 절차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용서라는 말을 부정적인 뉘앙스로 바라보는 경우도 많다. 

용서하면 지는 것이고, 용서하면 도리어 약해 보이고, 용서하면 경쟁에서 밀리고, 용서하면 결국 패자로 남게 된다는 인식이 점점 늘고 있다. 

용서보다는 비판이 매력적이다. 

날까로운 비판을 하는 사람이 칭찬받는다. 

용서하겠다는 사람은 대치 국면에서 뒤로 빠진다. 전투력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한다. 

용서하겠다는 사람까지도 비판받는다. 

용서하는 사람도 고통과 아픔을 갖고 있는 피해자인데, 그 사람이 어느새 준가해자가 된다. 

함부로 용서하지 말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용서가 이 시대의 단어가 되기 힘든 이유다. 

 

점점 용서 주위에 창의적인 생각이 모여들지 않는다. 

비판 주위에는 온갖 창의적인 생각과 아이디어들이 모여든다. 

비판의 정도가 점점 다양해 진다. 

비판하는 방식도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그러나 용서 주위에는 온화한 기운, 종교적 기운 외에는 남지 않는다. 

치열한 생각과 열정적 아이디어가 비판과 정죄 주변에 가득하다. 

비판과 정죄의 색깔은 샛빨강이지만, 용서와 화해는 옅은 푸른색이다. 

뉴스와 댓글은 비판적인 단어와 생각으로 가득하다. 

용서는 과연 어디서 일어나는지 찾아보기 어렵다. 

법정으로 사건이 가는 한 진정한 용서가 일어나기 불가능해 보인다. 

법원 판결에 기꺼운 마음으로 승복하는 경우도 별로 없거니와, 

가해자와 피해자가 끝까지 서로를 비난하고 비판하기 마련이다. 

점점 용서가 설 자리가 줄어든다. 

 

교회와 가정은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끝까지 남아야 한다. 

용서의 색깔을 더욱 진하게 칠할 수 있는 공간, 

용서 주변의 다양한 생각과 아이디어가 모일 수 있는 공간, 

용서의 진정성을 경험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공간, 

그런 공간으로 남아야 한다.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만, 그 공간에서 최선을 다해 죽을만큼 힘들지만, 용서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용서의 전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데 있다. 

부흥은 죄의 고백이 빠지지 않는다.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공동체 구성원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 진심을 사람들에게 표현한다. 

그럴 때 형제 자매의 용서가 일어난다. 

죄의 고백은 죄 값을 치르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진정한 죄의 고백은 그 죄값에 대해 고민하지 않게 한다. 

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까지도 생각하게 하는지를 진정한 회개자는 깨닫는다. 

성령님의 역사다. 

그 깨달음은 죄 값을 계산하려고 하지 않는다. 

미안함과 송구함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참회하고 보상하고 죄값을 치르려고 한다. 

그러니 사실 진정한 용서는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죄인의 죄를 드러내고, 진정한 참회로 이끌어야, 피해자들이 용서할 수 있는 전제가 완성된다. 

그래야 성령님이 마음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치료한다. 

이런 자연스런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령님은 자연스런 과정을 뛰어넘어 역사할 수도 있다. 

순서의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피해자의 용서가 가해자의 참회로 이끈다. 

이런 순서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부자연스런 과정을 인간이 억지로 만들려고 하면 안된다. 

사람은 자연스러운 과정을 추구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성령님은 때로 강력하게 역사하신다. 

그것을 막을 법은 없다. 

성령님만이 용서의 색깔을 더욱 밝고 굵고 화려하고 다양하게 채색하신다. 

인간은 지극히 제한된 색맹 수준일 뿐이다. 

 

사탄은 비판의 날을 더욱 날카롭게만 하라고 요구한다. 

그게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심지어는 돈도 벌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용서의 풍부한 의미와 방법들을 놓지 않는다. 

성령님은 가정과 교회에서 용서를 가능케 하시는 분이시다. 

사단에게 속지않고 성령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비판과 함께 용서를 배워야 한다. 

 

이 어려운 길을 끝까지 가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아무말 없이 그 수치의 끝에 올라가셨다. 

그러니 이 길을 포기할 수 없다. 

 

아… 예수님, 

거기계시는군요. 

 

[오늘의 기도]

용서는 어렵습니다. 

분노는 자연스럽습니다.

용서는 본성을 거스릅니다. 

분노는 속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용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조금씩 생겨납니다. 

성령님, 저에게 분별의 능력을 더하소서. 

사탄의 전략에 휘말리지 않게 하소서. 

가정과 교회에서는 용서의 색깔이 더욱 풍부하고 더욱 진해지게 하소서. 

마음의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생겨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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