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6 10 목요일

여는 기도

주님,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겠습니다.

 

15 압살롬은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무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으며,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들어왔다.

16 때에 다윗의 친구인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을 찾아와서, 압살롬을 보고, "임금님 만세! 임금님 만세!" 하고 외쳤다.

17 그러자 압살롬이 후새에게 물었다. "이것이 친구를 대하는 그대의 우정이오? 어찌하여 그대의 친구를 따라서 떠나지 않았소?"

18 후새가 압살롬에게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주님께서 뽑으시고 백성과 이스라엘 사람이 뽑아 세운 분의 편이 되어서, 그분과 함께 지낼 작정입니다.

19 제가 다른 누구를 섬길 있겠습니까? 당연히 부왕의 아드님을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제가 전에 부왕을 섬긴 것과 같이, 이제는 임금님을 섬기겠습니다."

20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물었다. "이제 우리가 무슨 일부터 해야 될지 의견들을 내어 보시오."

21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왕궁을 지키라고 남겨 후궁들과 동침하십시오. 이렇게 임금님께서 부왕에게 미움받을 일을 하였다는 소문을 이스라엘이 들으면, 임금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더욱 힘을 것입니다."

22 그리하여 사람들이 옥상 위에 압살롬이 들어갈 장막을 차려 주니,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였다.

23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같이 여겼다. 다윗도 그러하였지만, 압살롬도 그러하였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아히도벨도 함께 갔고, 다윗이 보낸 후새도 위장 전향하여 함께 했습니다(15-19절).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말을 따라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합니다. 이는 다윗을 미워하는 반란 세력이 더욱 결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20-22절). 패륜적인 행위였으나 아히도벨의 말은 압살롬에게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23절).

 

아히도벨은 다윗도 인정한 모략가 입니다. 압살롬에게 그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했습니다. 그 영향력 아래에 익숙해지면 주체적인 판단력을 상실하고 그 생각을 의존하게 됩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합니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목소리, 대상, 매체들은 무엇입니까?

 

——

 

이쯤 되면 반역은 성공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고 있다. 

예루살렘 사랃뜰은 어리둥절 자체이다. 

소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 

다윗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다윗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은 사람들은 믿을 없는 표정이었다. 

어찌 다윗이 모양이 되었는가

민족의 영웅과도 같은 다윗이 어찌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단 말인가

매년 다윗을 따라 전장터를 누볐던 백성들은 세월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흘렀는지 격세지감을 느꼈을 것이다. 

세상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적응하기가 너무 어려운 순간이 왔다. 

혁명때로 세상의 변화는 도둑처럼 다가온다. 예측하기 어렵다. 

 

코로나가 그렇다. 

일대 문화대혁명을 가져왔다. 

그동안 생각만했던 것들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격세지감을 느낀디. 

정치적 혁명만큼이나 어마무시한 삶의 혁명이 그동안 있어왔다. 

마스크, 거리두기, 온택트 

세상이 갑자기 변하면 어찌해야 바를 모르는 사람들은 현자를 찾는다. 

그래도 지금 시기를 지혜롭게 넘길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을 찾는다. 

마치 압살롭이 아히도벨을 찾듯이 말이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할 없다. 

책사가 필요하다. 아히도벨이나 후새 같은 모략을 펼칠 있는 참모가 필요하다. 

어찌보면 세상은 2인자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고 권력가들은 권력을 대표하기는 하지만, 참모들의 말을 듣지 않고서는 권력을 유지할 없기 때문에 2인자들을 의존할 밖에 없다.  

아히도벨은 다윗 왕에게도 많은 조언을 했던 인물이었다. 

혹시 압살롬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다윗에게 조언했었는지도 모른다. 

다윗의 정책에 대해 많은 부분 그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23절이 보여주고 있다. 

 

23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꼭 같이 여겼다. 다윗도 그러하였지만, 압살롬도 그러하였다.

 

아히도벨은 여러모로 지혜와 모략이 넘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실 조금 끔찍한 방식을 압살롬에게 조언하는 모습을 본다. 

다윗 왕의 후궁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 압살롬이 강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압살롬은 넘지 말아야 선을 넘었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람들에게 확실히 편을 정하라고 압박할 있었다. 

다윗 편인지 압살롬 편인지 결정을 해야 했던 것이다. 

중도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입장을 정하라고 한다. 

괜히 어정쩡하게 있다가는 도리어 공격을 받을 있다.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이다. 

그는 다윗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어떤 벌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는지도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압살롬에게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을 범하라고 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지혜로운 조언이었을 것이다. 

다윗의 죄를 부각하고, 그의 실각은 하나님의 심판이며, 그의 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적 대리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아히도벨은 그의 손녀 딸의 치욕을 갚을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아무리 어느 순간의 지혜로운 말과 책략이라도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압살롬은 돌아오지 못할 루비콘 강을 넘어버렸다. 

이제 압살롬은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정적을 죽일 있을 정도로 뜻이 강고함을 세상에 드러냈다. 아버지의 후궁들을 대낮에 범할 정도로 어찌보면 포악해 보일 정도로 사람들의 뇌리에 박혔다. 

이제 압살롬을 따를지, 아니면 도망자 다윗을 따라 도망자 신세가 될지를 결정해야 했다. 

이것이 예루살렘 백성들이 겪는 딜레마였다. 

 

세상이 바뀌면 딜레마에 빠진다. 

혁명이 일어나면 어느 편에 설지 고민이 깊어진다. 

잘못 결정하면 패가망신이다. 삼족, 칠족이 죽는다. 

정치적 혁명 아니라, 문화와 사회의 대혁명 속에서 사람들은 고심이 깊어질 밖에 없다. 

기존 질서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변화하는 흐름에 속할 것인가.

어느 순간에는 결정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어떤 결정을 하는지에 따라 삶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작년과 올해, 

나와 우리 공동체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답을 아는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누구도 답을 없었다. 

다만 각자의 의견이 있었을 뿐이다. 

엄청난 변화 앞에 사역자로서 고심이 깊어진다. 

어떻게 사역을 만들어 있을 것인가.

변화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변화는 불가피하다. 

예루살렘 성의 주인이 바뀌었 , 지금 세상의 중심이 바뀌었다. 

아히도벨이 아니라 예수님께 묻고 싶다. 

후새가 아니라 예수님의 인도를 받고 싶다.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 않을 수는 없으나, 의견은 의견일 , 그들도 정답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아무리 지혜로운 조언 조차도 주님의 앞에 비추어야 것이다. 

 

최근 사역의 가시적 열매를 기대할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1) 하나님 분으로 기쁨을 누릴 있어야 한다. 

2) 이슬람 선교사의 마음과 태도로 사역에 임해야 한다. 

3) 열매보다 가지 표현에 의미를 두고 자기 표현의 아카이빙을 시도하면 좋다. 

4)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다양한 시도를 해보자. 

 

이렇게 가지 정도가 머리를 맨돈다. 

하나님 분만으로도 삶의 의미와 기쁨을 유지할 있는가? 

이것은 나에게 계속 던지는 질문이다. 

그분이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할 있는가? 

 

이슬람 선교사분들은 10년을 사역해도 회심자 명을 얻는 일에 실패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분들이 사역에 임하는 자세는 열매에 있지 않다. 

지금 부르심에 자리에 자신이 있는지에 달려 있다. 

캠퍼스 현실이 지금 그렇다. 

회심자를 얻기가 점점 어렵다. 

년을 사역해도 여전히 맨땅일 있다. 

그럼에도 내가 부르심에 자리에 있다는 사실로 만족할 있다면 그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역자는 어떤 기쁨을 추가적으로 추구할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자기 표현 있겠다 싶다. 

열심히 자기를 드러내라. 글로, 그림으로, 영상으로, 자기의 은사로 드러낼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의 자기 세계를 구축하라. 

누가 관심을 갖든 갖지 않든 자기 만족을 추구하라. 

수년 전에 달인의 리더십에 대해 말하고 다닌 적이 있다. 

그렇다. 미래의 리더십은 달인에게서 나올 있다. 미래의 영향력은 자기를 계속 표현하면서 명확한 자기 세계를 구축한 달인에게서 나온다. 

그러니 지금 당장 영향력을 미친다는 조급증과 결벽증에서 나와 느긋하게 예술가의 삶을 살자. 

 

하지만, 우리는 사역자이니 만큼 있는 전략은 해보는 것이다. 

열매가 있든 없든,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과 에너지와 전략으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과정이 즐거울 있다.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일하라. 

전략을 짜면서 즐거울 있다. 

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주변 동역자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서 하고 싶은 일들을 보는 것이다. 

과정 자체가 열매가 되도록 하라. 

 

스스로에게 다시 다짐해 본다. 

 

——

하나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4 산업혁명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어떤 의견을 채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오늘의 일정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주님의 평안이 흘러가도록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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