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1월 21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 그 뒤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하셨습니다."

2 그러나 바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주가 누구인데, 나더러 그의 말을 듣고서, 이스라엘을 보내라는 것이냐? 나는 주를 알지도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도 않겠다."

3 그들이 말하였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무서운 질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 것입니다."

4 이집트의 왕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모세와 아론은 들어라. 너희는 어찌하여 백성이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느냐? 어서 물러가서, 너희가 할 일이나 하여라."

5 바로가 말을 이었다. "그들이 이집트 땅의 백성보다도 더 불어났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들이 하는 일을 중단시키려 드는구나."

6 바로는 그 날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리는 강제노동 감독관들과 작업반장들에게 명령하였다.

7 "너희는 벽돌을 만드는 데 쓰는 짚을 더 이상 이전처럼 저 백성에게 대주지 말아라. 그들이 직접 가서 짚을 모아 오게 하여라.

8 그러나 벽돌 생산량은 이전과 같게 하여라. 만들어 내는 벽돌의 수가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게을러서, 그들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하면서 떠든다.

9 그들에게는 더 힘겨운 일을 시키고, 그 일만 하게 하여서, 허튼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여라."

 

주석

그 주가 누구인데(2절) 바로는 모세와 아론, 특히 하나님을 향해 철저한 모욕을 드러냈다. ‘여호와가 누군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여호와’를 아는 주제가 이후의 장들에서 빈번하게 되풀이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IVP 성경주석).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는 주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지만, 바로는 그 ‘주’가 누구냐고 모욕하며 비꼽니다(1-2절). 모세는 바로의 거절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지만 쫓겨나고 맙니다(3-4절).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전보다 더 강도 높은 노역을 시키도록 명령합니다(6-9절).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자신의 무능함 사이에서 많은 고민과 갈등을 넘어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갖고 바로에게 당당하게 나아갔지만, 강력한 반대를 마주합니다.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다가 강한 반대에 직면한 적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파라오는 역시 왕이었다. 

왠만한 말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 스스로 신이라고 여기고 있다. 

수 많은 신들이 있는데, 도대체 어떤 신이 자신들의 노예를 데려간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신이 신전을 짓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들을 데려간단 말인가? 

납득하기 어렵다. 

안그래도 인구가 늘어 산아제한 정책을 펴기도 하고, 노동 강도를 높여 가며 통제하고 있는데, 

그들이 광야에 나아가 몇십만명이 집회를 가지면, 그동안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성토 대회를 가지면, 

그 위력과 위협이 얼마나 클 것인가? 

파라오 입장에서는 결코 허락해 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모세와 아론이 뭐기에… 

모세는 왕궁에 있었던 히브리 사람이지만, 과거에 살인을 저질러 광야로 도망친 작자 아닌가? 

아무런 권세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 와서 몇십만명의 노동자들을 데리고 나가겠다고 하니, 이건 미쳤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파라오 입장에서는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이 두 사람을 없애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집트의 왕은 역시 파라오였다. 

 

파라오는 묻는다. 

도대체 그 주가 누구냐고. 

도대체 히브리 백성을 끌고 나오라고 말하는 신이 누구냐고,

잘 알지도 못하는 신의 명령을 들을 리 만무하다. 

도리어 더 강력한 노동명령을 내린다. 

노동강도를 더 높여서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도록 강경책을 구사한다. 

모세와 아론의 말들이 파라오의 화를 돋구었다. 

 

상황은 더 악화일로다. 

자칫하면 파라오의 근위병에게 잡힐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소식을 접하면 모세와 아론에게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박해고 고난이다. 

상황을 타개할 만한 일들이 보이지 않는다. 

며칠 동안 모세와 아론이 겪었을 고통이 눈에 들어온다.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가족들은 챙길 여력이 없다. 

상황을 통제하기 어렵다. 

겨우 몸을 일으켜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그대로 진행하려고 해도, 모든 일이 다 수월하게 풀리는 것은 아니다. 

상황이 꼬이고, 사람들의 마음도 묶인다. 

꿈과 비전을 말하고, 미래의 소망을 말해도 꿈쩍도 안한다. 

도리어 비난과 비판이 난무하고, 인신공격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비난하는 사람들은 현실적인 이유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왜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 어렵고 힘든 길을 제시하는지 묻는다. 

마음이 떠나고 몸도 떠난다. 

공동체가 와해되고 하나됨이 무너진다. 

갈등과 긴장이 증폭하고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이 커진다. 

한 팀이 되어야 할 사람들끼리 와해되고 분열되어 산산히 흩어진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도 왜곡되고 저 운악산 꼭대기에 버려진다. 

 

그런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계속 말할 수 있는가? 

과연 하나님의 뜻이란 것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겠는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 혹시 잘못된 것이라고 회의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나님의 꿈과 비전이 헬륨 풍선처럼 북녘으로 사라진다. 

 

절망의 순간, 실패의 순간, 비통의 순간, 원망의 순간. 

우리 인간이 겪는 삶의 많은 부분이 이런 순간들이다. 

기대가 낭패가 되고, 소망이 원망이 되며, 비전이 허상이 된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원래도 그렇게 예상했었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예상했었고, 그 중에 하나 최악의 상황이 닥친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 원망의 마음이 돌아간다. 

왜 나를 부르셨나? 왜 나를 이곳으로 이끄셨나? 

모든 것이 그분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날이 있다. 

그런 일주일이 있다. 

그저 그럴 때는 그냥 있어야 한다. 

그분이 일하시길 멍하니 쳐다본다. 

하늘이 조율해 주시길… 하나님이 개입해 주시길… 

기도의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흩어졌던 꿈들이 다시 모이기를 바라며 운악산 정상을 쳐다본다. 

 

 

오늘 본문에서 도출할 수 있는 사실과 적용이다. 

 

1. 세상은 효율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 파라오는 일의 관점에서만 히브리 백성들을 대한다. 

- 모세와 아론에게도 너희가 할 일이나 하라고 말한다. 

- 노동강도를 더 높여서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한다. 

- 원래도 그랬지만, 당시에는 안식일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2.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한다. 

-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 예배드리는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려고 한다. 

- 공동체적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한다. 

 

3. 한 번의 실패를 실패로 여기지 마라. 

- 파라오에게 한 번 협상해서 실패했다고 그것이 실패라고 여기면 곤란하다. 

- 원래 큰 일일수록 오랜 걸리는 법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보라. 남북의 통일은 아직도 달성되지 못했다. 

- 실패로 여길 게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으로 전환하라. 

 

구정이다.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다. 

세상의 효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관점에서,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자. 

그리고 실패의 순간에도 절망하지 말고 다시 그분의 일하심을 기대하자.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새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설 명절을 통해 새해를 다시 시작하게 하시고, 

새로운 다짐들을 하게 하소서. 

무엇보다 세상의 관점으로 사람을 보지 않게 하시고, 

예배드려야 살 수 있는 예배자의 관점으로 보게 하소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졌을 때,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처량한지 알게 하소서. 

주님, 세상의 변화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임을 알게 하소서. 

그 올바른 관계에서 올바른 변화가 일어남을 믿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15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1 다윗은 자기와 함께 있는 백성을 점검하여 보고, 그들 위에 천부장들과 백부장들을 세웠다.

2 다윗은 모든 백성을 떼로 나눈 뒤에, 삼분의 일은 요압에게 맡기고, 삼분의 일은 스루야의 아들이며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에게 맡기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가드 사람 잇대에게 맡겼다. 그런 다음에 왕이 백성에게 자기도 그들과 함께 싸움터로 나가겠다고 선언하니,

3 백성이 외쳤다. "임금님께서 나가시면 됩니다. 우리가 도망을 친다 하여도, 그들이 우리에게는 마음을 두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절반이나 죽는다 하여도,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님은 우리들 명과 다름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임금님은 이제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4 그러자 왕은 그들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말하고 성문 곁에 있으니, 백성이 명씩, 명씩, 부대별로 나아갔다.

5 때에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부탁하였다. "나를 생각해서라도, 어린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여 주시오." 왕이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여 달라고 모든 지휘관에게 부탁하는 말을, 백성이 들었다.

6 다윗의 군대가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려고 들녘으로 나아가서, 에브라임 속에서 싸움을 하였다.

7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하였는데, 그들은 거기에서 크게 패하여서, 이만 명이나 죽었다.

8 싸움이 사방으로 번져 나가자, 속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이 칼에 찔려서 죽은 군인보다 많았다.

9 압살롬이 어쩌다가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쳤다.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있었는데, 노새가 상수리나무의 울창한 가지 밑으로 달려갈 때에, 그의 머리채가 상수리나무에 휘감기는 바람에, 그는 공중에 매달리고, 그가 타고 가던 노새는 빠져나갔다.

10 어떤 사람이 이것을 보고서, 요압에게 알려 주었다.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11 요압이 자기에게 소식을 전하여 사람에게 물었다. "네가 그를 보았는데도, 그를 당장에 쳐서 땅에 쓰러뜨리지 않았느냐? 그랬더라면, 내가 너에게 개와 하나를 주었을 것이다."

12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였다. "비록 개를 달아서 저의 손에 쥐어 주신다고 하여도, 저는 감히 손을 들어 임금님의 아들을 치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님께서 우리 모두가 듣도록, 장군님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누구든지 어린 압살롬을 보호하여 달라고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13 제가 임금님을 속이고, 그의 생명을 해치면, 임금님 앞에서는 아무 일도 숨길 수가 없기 때문에, 장군님까지도 저에게서 등을 돌릴 것입니다."

14 그러자 요압은 "너하고 이렇게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하고 말한 뒤에, 투창 자루를 손에 들고 가서, 아직도 상수리나무의 한가운데 채로 매달려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꿰뚫었다.

15 요압의 무기를 들고 다니는 젊은이 명도 모두 둘러싸고서, 압살롬을 쳐서 죽였다.

16 그런 다음에 요압이 나팔을 부니, 백성이 이스라엘 사람을 뒤쫓다가 돌아왔다. 요압이 백성에게 싸움을 그치게 하였기 때문이다.

17 그들은 압살롬을 들어다가 속의 깊은 구덩이에 집어던지고, 위에다가 아주 돌무더기를 쌓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망하여서, 저마다 자기 장막으로 돌아갔다.

18 평소에 압살롬은, 자기의 이름을 후대에 남길 아들이 없다고 생각하여, 살아 있을 때에 이미 자기 비석을 준비하여 세웠는데, 그것이 지금 '왕의 골짜기' 있다. 압살롬이 돌기둥을 자기의 이름을 따서 불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오늘날까지도 '압살롬의 비석'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출전하는 지휘관과 모든 백성에게 압살롬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합니다(1-5절). 다윗의 군대가 승리하고 압살롬은 쫓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나무에 매달립니다. 요압은 감히 왕의 아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잔인하게 압살롬을 죽입니다(6-18절).

 

아버지와 아들의 전쟁, 결국 아버지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이 전쟁에 승자는 없습니다. 모두가 패자일 뿐입니다. 원인은 사랑의 실패입니다. 아버지로서 다윗은 아들을 품고 용서해야 했습니다. 진정한 화해를 하며 사랑의 관계를 회복했어야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거절감, 그 깊이 파인 곳에서 미움과 원망의 마음이 싹 텄고, 분열과 전쟁, 죽음으로 열매 맺게 되었습니다. 비극적이고 슬픈 이야기 입니다.

 

——

전면전이다.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가 맞붙었다. 

다윗의 군대가 쫓기는 싶지만, 이들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들의 칼로 죽여봤던 살인 전문가들이다. 

오랜 행군으로 지쳐 있겠지만, 경험많은 장군들이 두루 포진한 다윗의 군대가 유리하다고 있다. 

요압, 아비새, 잇대 이렇게 장군은 매년 전장터를 누비던 사람들이다. 

다윗은 결국 전쟁의 승자는 자신이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전장터로 나가는 장군들에게 자신의 아들은 살려 주라고 말하고 있다. 

말은 전장을 수행해야 하는 장군이나 병사들에게 사기를 떨어뜨리는 말일 것이다. 

겨우 나라를 통일하고, 국력이 상당히 올라와서 주변국들이 조공을 바치는 주인의 나라가 되었음에도 내부적, 사적 권력관계의 갈등으로 인해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나라를 일으켰던 일등 공신들은 이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없다. 

그들은 다윗을 따라 나섰지만, 수많은 생각이 오갔을 것이다.

특히 요압은 잔꾀를 내어 압살롬을 예루살렘을 들인 장본인이다. 

그냥 암논을 죽이고 그술 땅에 망명한 압살롬을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 했다. 

죄에 대해 엄중히 물어야 했다. 암논의 죄건 압살롬의 죄건 말이다. 

죄를 엄중히 다루지 못하다 보니, 나라 꼴이 엉망이 되었다. 

애꿎은 이스라엘 병사들만 수만명이 죽어나갔다. 국력이 쇠하여 진다. 

다시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는 , 반란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숙청해야 하는 과정 정말 하기 싫은 일들이 남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처형 당할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 전체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다. 

외부의 적을 향해 칼을 드는 것은 정당성을 확보할 있으나, 내전은 언제나 국력의 대부분을 잃게 한다. 

 

625전쟁이 그랬다. 힘을 모아 그동안 한반도를 침략했던 나라들을 몰아내는 최선을 다해야 했건만, 이념으로 나뉘어져 민족이 내전을 겪는다. 3년간 서로를 죽이고 끔찍한 기억이 남아 십년을 내려왔다. 상흔이 너무 깊어 용서가 안된다. 아직도 38선이 지도에서 사라지지 않은 이유다. 

그러니 내전은 안된다. 미얀마도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하는데, 군부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요압은 땅을 치며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요압이 압살롬을 처단한 것이 이해가 된다. 

비록 왕이 부탁이 있었긴 했지만, 압살롬으로 인해 수만명이 사지로 내몰렸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갈지 모르는 일이다. 나라에 인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약해진 국력을 틈타 언제 외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다. 나라가 망해버릴 수도 있다. 몇십년을 전장에서 지낸 장군의 눈엔 원망과 원통함이 쌓일만도 하다. 자신들의 부하가 어이없는 전쟁에 의해 죽어나가고 있다. 

 

암논이나 압살롬이나 자신의 죄에 대해 응당한 대가를 미리 치렀어야 했다. 

왕자라도 넘지 말아야 선이 있다. 그들은 선을 넘은 것이다. 

암논도 그렇지만 압살롬은 자신의 형제들이 보는 곳에서 암논을 살해했다. 

그런일이 다시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기드온의 아들들이 바위에서 죽었던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버젓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와 같은 일이 압살롬에 의해 다시 벌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왕은 압살롬을 오히려 왕으로서 버려야 했다. 아버지로서 가끔 찾아가 만날 있었다. 그래도 왕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압살롬은 압살롬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어차피 그는 예루살렘에 왔어도 죽은 사람처럼 지냈다. 

 

18 평소에 압살롬은, 자기의 이름을 후대에 남길 아들이 없다고 생각하여, 살아 있을 때에 이미 자기 비석을 준비하여 세웠는데, 그것이 지금 '왕의 골짜기'에 있다. 압살롬이 그 돌기둥을 자기의 이름을 따서 불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오늘날까지도 '압살롬의 비석'이라고 한다.

 

그의 자녀가 없지 않았다. 명의 아들(사무엘하 14:27) 있었는데, 아마도 일찍 죽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그는 인생의 낙이 사라졌다. 

아들이 없으니, 자신의 비석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예루살렘에서의 삶도 쓸쓸함 자체였다. 

 

과연 다윗왕은 어떤 결정들을 내렸어야 했나?
예수님은 뭐라고 조언을 하실까? 

왕은 높은 윤리적 기준과 덕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왕은 하나님 통치의 실질적 대리자였다. 

왕은 사적 감정으로 백성들을 죽음에 몰아넣어서는 안된다. 

다윗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신복 우리야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아들들의 죄를 엄중히 묻지 못해 이스라엘은 내전으로 들어갔다. 

과연 다윗 왕이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했는가? 

다시 봐도 아니다. 그는 철저히 실패했다. 

그의 실패한 인생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남아 대대손손 흐른다. 

이게 아이러니다. 

신하로서 다윗은 성공했지만, 왕으로서 다윗은 철저히 실패했다. 

전장터에서 다윗은 위대했지만, 왕궁에서의 다윗은 비참했다. 

그가 예배 의식에는 우선 순위가 있었지만, 가정을 돌보는 일은 잼뱅이였다. 

가지를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인간은 실패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모두를 충실히 완벽하게 수행하는 사람은 없다. 

높은 퍼포먼스를 보여주려면 다른 무언가에 누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그렇게 완벽하게 있는 분은 예수님이시데, 문제는 예수님도 육체로 계실 때는 한계 때문에 완벽하게 주변을 챙길 없는 없었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문전박대했으며, 결국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어머니에게 너무 상처를 안겼다. 

그러니 예수님도 어쩔 없이 어느 순간엔 가정을 내려 놓을 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의를 위해 사적 관계에 충실할 없었다. 

인간 왕은 그렇게 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해야 한다. 

평소에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부르심의 때가 있고, 사적 관계를 벗어나야 때가 있다. 

때를 분별해야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실패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하다. 

 

리더십은 어쩔 없이 실패한다.

완벽한 성공은 없다. 결점이 가려질 뿐이다. 혹은 용서될 뿐이다.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들은 실패하기 일쑤다. 

이게 인간의 한계다.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외친다 해도, 실제는 실패다. 

인간은 하나님 나라를 완벽하게 구현할 없다. 

그러니 너무 이상주의에 매몰 필요없다. 

이상주의에 함몰된 사람이 크게 실패하기 마련이다. 

하나님 나라의 이상적 비전이야 우리가 소망해야 일이다. 

그러나 현실이 못미친다고 크게 분노할 일이 아니다. 작게 분노할 일이다. 

현실은 언제나 비전을 따라가지 못한다. 

 

주님의 긍휼하심이 오늘도 가득하길 기도한다. 

 

——

실패한 인생들은 너무도 많이 보아오신 하나님, 

인생도 수많은 결점들이 곳곳에 박혀 있습니다. 

오랫동안 공동체의 리더로 살아왔지만, 부족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었을지 생각해 보면 아찔합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주님 

예수님처럼 살고 싶지만, 완벽하게 따라하기에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닮는 노력을 포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주께서 도와 주세요. 

겸손하게 오늘도 주님의 인도를 구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평안과 안식을 주는 시간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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