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4 01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7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해골이라 하는 데로 가셨다. 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하였다.

18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박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아서, 예수를 가운데로 하고, 좌우에 세웠다.

19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명패에는유대인의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썼다.

20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도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이 명패를 읽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 있었다.

21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이라고 쓰십시오하였으나,

22빌라도는나는 것을 썼다하고 대답하였다.

23병정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박은 뒤에, 그의 옷을 가져다가 몫으로 나누어서, 사람이 몫씩 차지하였다. 그리고 속옷은 이음새 없이 위에서 아래까지 통째로 것이므로

24그들은 서로 말하기를이것은 찢지 말고, 누가 차지할지 제비를 뽑자하였다. 이는그들이 나의 겉옷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다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정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

25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있었다.

26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곁에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어머니,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시고,

27 다음에 제자에게는, 이분이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때부터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예수님은 해골이라는 의미의골고다라는 곳에서 , 우편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십니다(17-18). 그의 죄를 알리는 명패에는유대인의 이라는 내용이 아람어와 그리스어,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19-22). 이것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왔던 흩어진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모두가 알아볼 있는 언어로 표시된 것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음으로 인해, 시편에 기록된 메시야 수난에 대한 예언( 22:18 참조) 성취됩니다(23-24).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시는 , 모친을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십니다(25-27).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십자가에서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신, 세상을 위한 사랑의 왕이십니다.

 

——

진짜 유대인의  

십자가를 끌고 가시는 장면은패션오브크라이스트라는 영화에서 실감나게 그렸다. 

구절 하나로도 오랫동안 머물고 묵상할 있을 것이다. 

왕이신 예수님이 사형틀을 직접 끌고 가신다. 

몸에 상처 투성이요. 머리엔 가시 면류관 자국이 선명하고, 옷은 피로 얼룩져 있다. 겉옷과 속옷 것없이 예수님의 피로 물들었다. 나중에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그의 속옷을 제비 뽑아 가져갔다고 하는데,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 왕의 피를 빨아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요한은 예수님의 명패를 자세히 묘사한다(19-22). 아마도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보인다. 

무슨 메시지일까? 

십자가에는 죄명이 달리는 것이 상식적이다. 

The irony in John continues as the reason for the death of Jesus received its official entitlement or “notice” (titlon). Frequently persons condemned to death had their offense written on a placard and either hung on their bodies or carried before them as they were paraded to the execution site.
_Gerald L. Borchert, John 12–21, vol. 25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2), 264.

사람이 여기에 이런 처벌을 받게 되었는지를 사람들에게 공표하는 행위다.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도 형벌의 정당성을 확보해준다. 

사람들은 공개 처형의 끔찍함을 그의 죄를 보고 상쇄시킨다. 

 

그런데 요한이 보기에 예수님의 명패(죄명)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죄명과 너무 다르다. 

유대인의 나사렛 사람 예수”, 이것은 죄명이라고 하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것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있었을까? 유대인의 삶을 애정했던 예수님, 유대인들의 병을 고치고, 먹을 것을 나눠주셨던 예수님, 그들을 위해 기적을 행했던 예수님. 그래서 많은 민중들은 예수님을 왕처럼 대하지 않았나!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께 그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누가복음 19:38) 이라고 노래를 불렀다. 과연 죄패로 이런 민중들을 설득할 있었을까? 의문이다. 오히려 사람들을 자극하고, 민중들을 격동케 하는 행동 아닌가? 사실 비정치적인 행위로 비춰진다. 

 

게다가 죄패가 맘에 안들었는지, 대제사장들은 수정을 요구했다. ‘자칭이라는 말을 넣으라는 것이었다. 유대 민중들이 그를 임금으로 왕으로 추앙하고 있지 않다고 애써 부인하는 자세다. 만약 빌라도가 INRI(라틴어: IESVS·NAZARENVS·REX·IVDÆORVM) 한국어로 번역하면 "유다인들의 임금나사렛 사람 예수이란 뜻을 가진 천주교의 두문자어이다.) 쓰려고 한다면, 그것도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 출신 유대인 그리고 심지어 로마병정들까지도 죄패를 읽게 하려고 한다면(20), 결코 유대인의 왕으로 써서는 안된다고 판단한 같다. 대제사장이 원했던 죄패는 아마도 반역자, 신성 모독자, 사기꾼, 반역시위 주동자, 민심 소란죄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이 스스로 말했던 ,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던 말을 죄패에 썼다. 제사장들의 요청도 거부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대제사장 손에 맡긴 것은 사실이지만, 사형을 집행함에 있어서 그는 제사장들의 요구를 들어 마음이 없었다. 뭐에 홀렸는지, 빌라도는 유대 민중들이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는 , 그것을 그대로 죄패에 적었다. 그리고 죄패는 예수님의 영광의 명패 되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의 유대인의 왕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날은 죄인의 처형식이 아니라 왕의 대관식이었다고 말이다. 맞는 같다.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고 벌거벗겨진 채로, 왕의 대관식을 맞이하고 있다. 또한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왕의 대관식이 이토록 처참하고 부끄러울 있는가. 과연 대관식을 영광의 순간이라고 부를 있는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요한은 십자가를 예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왕이 부끄럽게 죽어가고 있는데, 그게 우주의 가장 영광스러운 왕의 대관식이었다. 

 

빌라도는 부지불식간에, 어찌저찌하다가 결국 예수님의 왕의 대관식을 준비한 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모든 민중들이 함께 인정하는 왕이 것이다. 

십자가에서 사단, ,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를 이루신다. 승리가 왕의 대관식이 것이다. 마치 반지의 제왕 3 왕의 귀환에서처럼 말이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왕이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그래서 그분이 왕이 되신 것이다. 진짜 말이다. 자칭 왕이 아니라 우주가 인정할 밖에 없는 왕이 되신 것이다. 

 

왕을 찬양한다. 

수치로 영광의 관을 쓰셨다. 

고통으로 왕좌에 오르셨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주인이 되셨다. 

그의 놀라운 너무나 창의적인 지혜를 찬양한다. 

2021년 03월 31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그 때에 빌라도는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으로 쳤다.

2병정들은 가시나무로 왕관을 엮어서 예수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힌 뒤에,

3예수 앞으로 나와서 “유대인의 왕 만세!” 하고 소리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다.

4그 때에 빌라도가 다시 바깥으로 나와서,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그 사람을 당신들 앞에 데려 오겠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나는 당신들이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라오.”

5예수가 가시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으신 채로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보시오, 이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6대제사장들과 경비병들이 예수를 보고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러자 빌라도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하고 말하였다.

7유대 사람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8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서

9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11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오. 그러므로 나를 당신에게 넘겨준 사람의 죄는 더 크다 할 것이오.”

12이 말을 듣고서,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이 사람을 놓아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 폐하를 반역하는 자입니다” 하고 외쳤다.

13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데리고 나와서, 리토스트론이라고 부르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론은 히브리 말로 가바다인데, ‘돌을 박은 자리’라는 뜻이다.)

14그 날은 유월절 준비일이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당신들의 왕이오.”

15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 밖에는 왕이 없습니다.”

16이리하여 이제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를 넘겨받았다.

 

예수님은 군인들에 의해 채찍질을 당하고 가시관과 자색 옷이 입혀져 뺨을 맞으며 수치와 조롱을 당하십니다(1-3절). 빌라도가 여전히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상처입고 찢긴 예수님을 데려오지만,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4-6절).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즉 그들의 왕이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외칩니다(7, 12절).

 

빌라도는 백성들의 외침에,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넘겨줍니다(12-16절).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임을 말씀하십니다(11절). 온 세상의 참된 왕이신 그분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고통과 수치를 당하시며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

차가운 리토스트론

 

눈물겹다. 

빌라도의 노력이 가상하다. 참 애쓰고 있다. 몇 번이나 예수님에 대한 판단을 미루고 있다. 아니 예수님의 무죄 방면을 힘쓰고 있다.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고 병사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때리라고 허용한 것은, 이제보니 방면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이 정도 했으니 사형하라는 둥, 십자가에 달라는 둥, 너무 극단적인 조치를 요구하지 말라는 임기응변이었다. 이 모든 것인 유월절 전날,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이런 직결심판을 내릴 권한을 가진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는가! 총독이라 하더라도, 아침에 잡혀온 죄수에게 몇 시간 만에 사형을 언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예수에 대한 소문은 익히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이 예수를 좋아한다는 것도, 예수가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죄명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면, 그 유대인의 왕을 반나절 만에 재판하고 사형을 언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일단 쫌 때린 뒤에, ‘그래도 너희들의 왕이라고 하지 않느냐’라는 메시지와 함께 유대인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만하면 됐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 기득권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6절).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는 사라지게 해야 한다. 더이상 남겨 둘 수 없다. 그들의 외침은 여전히 들리는 듯 하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는 법적/양심적으로 도저히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가 없었다. 유대 지도자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할 테면 여러분들이 하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을 수가 없었단 말이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을 들먹이며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예수님이 한 말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 이 말은 지식인들 사이의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단어였을 것이다. 만약 당시에 신문이 있었다면, 대서특필 뿐 아니라 모든 논설위원들이 논평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등장… 각계 전문가들이 분석기사를 쏟아내고,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로 몇날 며칠을 보냈을 수도 있다. “예수, 하나님의 아들인가?” 기사가 쏟아질 때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확산 될때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분노했다. 욕했다. 죽이고 싶어했다. 

 

빌라도는 그 정도의 민감함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으며, 민중들의 환심을 사고 있는 인물, 가끔 기이한 행적, 마술 같은 기적을 몰고 다니는 존재. 핵심은 민중들이 따른다는 점, 이 정도로 파악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의 입에서 죄의 근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자기 주장’에 있다면, 빌라도는 더욱 궁금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도 살렸다는 참모들의 보고를 들은 빌라도는 더욱 의문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궁금해 미치겠다. 어떡해서든 자신은 피를 묻히기 싫어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혹시 진짜면? 진짜 신의 아들이면?

 

빌라도는 리토스트론에 앉기가 싫었다. 너무 차가웠다. 민중들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님 종교 지도자들의 편에 설 것인가? 유대인의 왕을 진짜 죽이면 민중 소요가 일어나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종교지도자들의 요청을 거절하면 그들의 지지를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는 건 아닌가? 등등 생각이 엄청 복잡했을 것이다. 게다가 개인적인 궁금함도 더했다. 종교적인 질문도 가세했다. 여튼 리토스트론은 차가웠다. 

 

빌라도가 잘했다 잘 못했다 평가하지 않고 싶다. 

하지만 빌라도가 처한 상황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온갖 딜레마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누구를 위할 것인가? 누구를 이롭게 할 것인가? 

무엇이 진정 나와 내 가족과 내 회사와 내 교회를 위한 것인가? 

온갖 질문들이 떠돌아 다닌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복잡한데, 리더십을 발휘해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정말 나의 생각과 관점이 옳고 바르고 적절한 것인가? 

 

딜레마 앞에 매일 선다. 

그러기에 그 딜레마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죄로 인해 모든 진실이 왜곡되어 보인다. 만화경 속에 갇혀 있다. 죄로 인해 판단력이 흐리다. 

그러기에 선택의 기로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난 별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난 그 리토스트론에 앉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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