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21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2 여러분은 마음을 넓혀서, 우리를 받아 주십시오. 우리는 아무에게도 부당한 일을 한 적이 없고, 아무도 망친 적이 없고, 아무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없습니다.

3 여러분을 책망하려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에도 말하였거니와, 여러분은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것입니다.

4 나는 여러분에게 큰 신뢰를 두고 있으며, 여러분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온갖 환난 가운데서도, 나에게는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칩니다.

 

5 우리가 마케도니아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의 육체는 조금도 쉬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환난을 겪었습니다. 밖으로는 싸움이 있었고, 안으로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6 그러나, 실의에 빠진 사람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디도를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7 그가 돌아온 것으로만이 아니라, 그가 여러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그리워하고, 내게 잘못한 일을 뉘우치고, 또 나를 열렬히 변호한다는 소식을 그가 전해 줄 때에, 나는 더욱더 기뻐하였습니다.

8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후회하기는 하였지만,

9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였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

10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11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응징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2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편지한 것은, 남에게 불의를 행한 사람이나, 불의를 당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여러분의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환히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NIV

Make room for us in your hearts. We have wronged no one, we have corrupted no one, we have exploited no one(2절).

 

주석

2-4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 자신과 화해하자고 호소한다. 자신의 행동에 화해를 가로막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충분히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 화해를 고린도 교인들과 자신의 관계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IVP 성경주석).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진실함을 호소합니다(2-4절). 그는 디도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로 인해 걱정했지만,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과 화해하기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합니다(5-10절). 갈등을 회피하지 않고 진실하게 마주한 이들에게 회개와 화해의 기쁨이 넘칩니다(11-12절).

 

온갖 환난과 싸움과 두려움에도 포기하지 않은 바울의 마음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원했던 고린도 교인들과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아픔과 후회가 있었지만, 그 결과로 얻은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회개와 화해의 과정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아픔이라면 결코 손해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변호하는 사람도,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린도 전서에서만 봐도, 여러 파가 존재했다. 

바울파, 아볼로파, 바나바파, 예수파… 

사실 우리 모두는 예수님 중심으로 묶여야 하지만, 원래 인간들이 자신들의 당파를 만들어 특별한 소속감을 느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조직을 만들곤 한다. 

그 사조직이 분열을 이끈다. 

분열로 인해 고린도교회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 

교인간의 분열은 자칫 교리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 

자신의 성향 문제를 교리의 문제로 치환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개인적 성향에 의해 교리를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충분한 공부와 학습과 이해가 결여되면, 결국 자신의 성향대로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도 놔버리는 우를 범하곤 한다. 

바울은 이런 분열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교리적 타락, 우상숭배의로의 타락, 성적 타락, 은사받은 자들의 교만을 지적하면서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애쎴다. 

직접 방문할 생각도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편지를 쓴 것이다. 

비판적인 편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죄에 대해 적나라하게 적었던 것 같다. 

고린도전서도 그런 비판의 내용이 나오지만, 두 번째 보낸 편지는 좀더 심했던 걸로 보인다. 

바울도 여러 번 반복적으로 그 편지가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적고 있다. 

성도들의 죄를 조목조목 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죄를 지적함과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아프게 하는지, 

그리스도를 욕보이게 하는지 적었던 것 같다. 

편지를 읽는 내내 성도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솔직히 어떤 사람들은 그 편지로 인해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바울의 진심어린 진솔한 비판을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집중했다. 

그렇게 그들은 바울의 편지로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9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였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

10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바울 마음 속에는 기쁨이 점점 찾아오고 있다.

성도들이 바울의 진심을 알아주고 있다. 

성도들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고 있다. 

마음이 아팠지만, 그 아픔이 도리어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으로 이끌고 있다. 

하나님도 때로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바울은 적고 있다. 

구약의 역사에서도 엇나가는 백성들을 호되게 꾸짖으시거나, 그게 작동하지 않으면 물리적인 충격을 주시곤 했다.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좋은 촉매제가 된다. 

 

물론, 이런 마음의 작동에는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함으로 회개하게 만드는 일은, 어찌보면 무당들이 제일 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죄를 들춰내고 두려움을 심어준다. 그래서 사단의 노예가 되게 만든다. 

종교적 노예가 되게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이다. 

강력한 질책, 죄책감과 두려움, 복종과 노예화… 

기독교도 이런 심리적 메카니즘을 통해 사이비를 출생한다. 

이걸 기술로 삼아 교회를 운영해서는 안된다. 

복음은 죄책감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유를 선포한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가져다 주는 참 자유를 선포한다. 

문제는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거스르는 행위를 무분별하게 할 때다. 

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온당하며, 그래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준을 갖게 된다. 

어쨌든,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는 종교적 기술로 사람들을 옭아매는 것은 잘못이다. 

 

핵심은 이걸 기술로 쓸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성도들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섬기려고 하면서 그리고 본을 보이면서, 성도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핵심이다. 

사랑이 아니라 기술로 다가가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종교가 되어 버린다.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이 전제한 뒤에 죄에 대한 지적과 훈계가 이어져야 한다. 

지적과 훈계가 습관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그래서 문제가 된다. 

습관 혹은 강박은 진실된 사랑과 거리가 있다. 

자신도 모르게 비판, 지적, 훈계를 강박적으로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라 참지 못해 습관적으로 강박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사랑으로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비판과 지적으로 자기 사람을 만들어온 사람들은 계속 그 방법을 사용한다. 

 

목회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죄책감을 통한 자기 사람 만들기다. 

죄책감을 계속 조장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그에 미치지 못하면 신랄하게 비판한다. 

성도들은 참 힘들지만, 그 심리적 메커니즘에 중독되어 있다. 

자신을 혼내주는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아니 혼나기를 욕구하기도 한다. 

일종의 메조키스트적 욕망이다. 

이걸 이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서는 안된다. 

진심을 담아 사랑하는 사람이 비판할 자격을 얻는다. 

그러니 목회는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다. 

사랑해야 그 설교에 진정성이 남는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주님은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으십니다. 

죽음으로 당신의 진정성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떻게 저의 진심을 담아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를 외칠 수 있을까요?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육체의 욕망이 아니라 진정성있는 태도로 끝까지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세요. 

사랑을 담아, 진심을 담아, 주님께로 돌아올 것을 호소하게 하소서. 

사람들의 죄악에 대해 회개를 요청하게 하소서. 

사랑과 비판. 이 둘을 조화롭게 감당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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