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2월 25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믹돌과 바다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쪽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고 하여라.

3 그러면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막막한 광야에 갇혀서 아직 이 땅을 헤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4 내가 바로의 고집을 꺾지 않고 그대로 둘 터이니, 그가 너희를 뒤쫓아 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와 그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니, 이집트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5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쳤다는 소식이 이집트의 왕의 귀에 들어갔다. 그러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이 백성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우리에게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풀어 주어 놓아 보내다니, 어쩌자고 이렇게 하였는가?" 하고 후회하였다.

6 바로는 병거를 갖추고, 그의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7 그는 특수병거 육백 대로 편성된 정예부대와 장교들이 지휘하는 이집트 병거부대를 모두 이끌고 나섰다.

8 주님께서 이집트의 왕 바로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시니, 바로가, 주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당당하게 나가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뒤쫓았다.

9 마침내 바로의 모든 병거와 기마와 그의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여,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비하히롯 근처 바알스본 맞은쪽 바닷가에 이르렀다.

 

10 바로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개를 들고 보니,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크게 두려워하며, 주님께 부르짖었다.

11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말하였다.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12 이집트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13 모세가 백성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 보기만 하십시오. 당신들이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14 주님께서 당신들을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당신들은 진정하십시오."

 

주석

이집트의 군대(5-9절) 이 시기 대부분의 병거 부대는 10-150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600대는 대규모의 부대다. 오직 바로의 부대만이 그 정도 규모였다(IVP 배경주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바다를 등진 채 진을 치게 하셔서, 바로의 군대를 유인하십니다. 이곳에서 바로의 군대는 무너질 것이며, 이로 인해 이집트 사람이 주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1-4절). 생각을 바꾼 바로는 특수병거 육백 대와 함께 이스라엘 자손을 추격해 왔습니다(5-9절). 바로의 병거부대를 본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10-12절). 모세는 백성들을 진정시키며, 주님이 행하실 일을 지켜보라고 말합니다(13-14절).

 

이집트의 정치, 종교, 경제, 사회 체계를 붕괴시킨 하나님은, 이제 바로의 군사력마저 물리치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집트의 주님이심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이 계획을 믿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병거부대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심지어 다시 이집트의 노예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두려움에 반응하지 말고 잠시 가만히 멈추어 주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싸우실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핵미사일이 발사되었다. 

곧장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로 향한다. 

경보기가 울린다. 

어디 갈 데가 없다. 

이제 죽을 일만 남았다. 

 

홍해 앞에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당대 최고의 군사력과 병기를 가지고 이스라엘에게로 다가온다. 

200만에 가까운 이스라엘 사람들은 앞뒤가 꽉 막혔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 

이제 죽음만이 그들을 기다린다. 

그것도 대량 학살이다. 

어디 피할데도 없다. 

이집트 정예군의 칼날에 도륙될 판이다. 

괜한 짓을 했다 생각한다. 

그저 이집트에서 일하다 죽는 게 낫다. 

어린 아이들과 늙으신 부모들과 함께 광야에서 독수리 밥이 될 지경이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결국 하나님을 원망한다. 

 

핵미사일이 이제 곧 떨어진다. 

경보기의 싸이렌이 더 격하게 울린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두려워말라고 말한다. 진정하라고 말한다.

우리 민족의 영적 지도자, 모세와 아론! 

과연 그들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겠는가? 

도대체 어떤 근거로 두려워말라고 하는가? 

어떤 근거로 진정하라고 하는가? 

물론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메세지를 들었단다. 

하나님이 핵미사일의 공격에서 보호해 주신다고 한다. 

이 공격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도대체 말인가 방군가!! 

이미 발사된 핵미사일을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홍해 앞에 진을 쳤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셔서 그에 순종했다. 

그러나 그 순종의 결과가 집단 학살 내지는 집단 수장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백성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은 모세와 아론을 죽이고 다시 이집트 파라오에게 항복하는 것이다. 

원망과 반역의 기운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퍼진다. 

 

과연 나는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을까? 

10가지 재앙을 경험했지만, 

불기둥, 구름기둥을 경험했지만, 

미래의 이스라엘의 삶(유월절, 무교절 등)에 대해 하나님께 설명을 들었지만, 

다시 파라오가 이렇게 뒤쫓아 올지는 몰랐다. 

심장이 뛴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온 몸에 긴장의 땀이 흐른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 시대는 위기로 가득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회적, 자연적 위기로 가득합니다. 

위기 앞에서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주님의 인도를 구하게 하소서. 

원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동안 주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역사와 개입을 마음 속에 각인시켜 위기의 순간에도 강력한 방패가 되게 하소서. 

주님, 끝까지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순종의 삶으로 이끌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2월 07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바로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하여라.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의 백성을 보내어라. 그들이 나에게 예배드리게 하여라.

14 이번에는 내가 나의 온갖 재앙을 너와 너의 신하들과 백성에게 내려서, 온 세상에 나와 같은 신이 없다는 것을 너에게 알리겠다.

15 내가 팔을 뻗어서 무서운 질병으로 너와 너의 백성을 쳤다면, 너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16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여 주어, 온 세상에 나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고, 내가 너를 남겨 두었다.

17 그런데 너는 아직도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나의 백성을 내보내지 않는다.

 

18 그러므로 내일 이맘때에 내가 매우 큰 우박을 퍼부을 것이니, 그처럼 큰 우박은 이집트에 나라가 생긴 때로부터 이제까지 한 번도 내린 적이 없다.

19 그러니 이제 너는 사람을 보내어, 너의 집짐승과 들에 있는 모든 것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라.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들에 남아 있는 사람이나 짐승은, 모두 쏟아지는 우박에 맞아 죽을 것이다.'"

20 바로의 신하들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자기의 종들과 집짐승들을 집 안으로 피하게 하였다.

21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종과 집짐승을 들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22 그 때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늘로 팔을 내밀면, 우박이 온 이집트 땅에, 그리고 이집트 땅에 있는 사람과 짐승과 들의 모든 풀 위에 쏟아질 것이다."

23 모세가 하늘로 그의 지팡이를 내미니, 주님께서 천둥소리를 나게 하시고 우박을 내리셨다. 벼락이 땅에 떨어졌다. 주님께서 이집트 땅 위에 우박을 퍼부으신 것이다.

24 우박이 쏟아져 내리면서, 번갯불도 함께 번쩍거렸다. 이와 같은 큰 우박은 이집트에 나라가 선 뒤로부터 이집트 온 땅에 한 번도 내린 적이 없다.

25 이집트 온 땅에서 우박이, 사람이나 짐승이나 할 것 없이, 들에 있는 모든 것을 쳤다. 우박이 들의 모든 풀을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부러뜨렸다.

26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고센 땅에는 우박이 내리지 않았다.

 

바로와 이집트 사람들을 살려둘 만큼 재앙을 내리신 이유는, 주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14-16절). 바로의 교만은 이집트 사람들이 처음으로 생명을 잃게 만드는 우박 재앙을 불러옵니다(17-18절). 주님이 우박 재앙으로부터 피할 길도 알려주시지만(19절), 이집트 신하들의 반응은 양쪽으로 갈립니다(20-21절). 우박으로 인해 집 밖에 있던 모든 것들이 초토화됩니다(25절).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땅에는 우박이 내리지 않았습니다(26절). 

 

바로의 신하들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우박 재앙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20절).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심판의 길만이 아니라, 구원의 길도 마련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생명과 죽음이 나누어집니다. 매일 주어지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 삶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묵상]

16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여 주어, 온 세상에 나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고, 내가 너를 남겨 두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도와 뜻을 분명하게 제시하신다. 

바로를 남겨 둔 이유, 그를 살려 둔 이유, 그에게 기회를 준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었다. 

“나는 곧 나다”라는 이름의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 계신 분, 다른 어떤 피조물로도 형용될 수 없는 분, 다른 개념이나 우상이나 상징으로 그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는 바로 그분의 이름. 

이 이름을 만천하에,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한 민족의 하나님, 신이 아니라 오직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을 공표하는 것이다. 

천 개 이상의 이집트 신들 중 하나의 신으로 전락하는 것을 참으실 수 없으시다. 

태양이나 강과 같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숭배하는 꼴을 보실 수 없다. 

개구리나 암소, 황소, 뱀 같은 동물들이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와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을 보고만 있으실 수 없다. 

사탄은 신성의 동물화, 사물화로 하나님의 위엄과 존엄을 놀림감으로 만든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동물이나 사물의 상징 밑으로 쳐박아 버린다. 

하나님도 경멸하고 인간도 무시한다. 

오직 사탄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경박한 체계 속에 사람들과 자연을 묶어 둔다. 

하나님은 더이상 파라오로 대표되는 사탄의 궤계 (간교한 생각이나 음모. 유혹. 계략.)를 내버려 둘 수 없으시다. 

당신 이름의 영광을 되찾아 오셔야 했고, 떨어진 인간의 가치를 되살려야 했다. 

그래서 파라오를 아직까지도 살려두신 것이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보라. 

그분은 인류 전체에 당신 이름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신다. 

인류는 언제부턴지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주의 작은 영감이 녹아 있는 피조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은 버리고, 눈에 보이는 해, 달, 별과 동물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수 천, 수 만 가지 신들이 등장했다. 

왕들은 저마다 자기가 신이라 주장했다. 

전쟁의 전사들, 장군들은 자신이 신이라 주장했다. 

신의 대리인, 신적 존재로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통치가 쉬워지고, 군사를 일으킬 수 있다. 

전쟁을 하고 침략과 약탈을 하려면, 눈에 보이는 신적 존재가 등장해야 한다. 

점점 하나님이 뒤로 빠지는 일이 일어난다. 

창조주는 뒤로 빠지고 피조물들이 그 자리를 침탈한다. 

그 결과는 죽음이다. 전쟁이다. 인간 본성이 오염된다. 흑화된다. 

사탄의 전략이다. 그의 전략이 성공하는 듯 보인다. 

하나님이 세상에 개입하시기 전까지 말이다.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을 구출하시는 과정을 통해 당신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리기 원하신다. 

그리고 그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 신, 유일한 신임을 드러낸다.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찬양받으셔야 한다. 

그 어마어마한 위대한 작업을 시작하신다. 

이스라엘의 구출과 함께 시작하신다. 

이스라엘은 그 위대한 일에 택함을 받았다. 

이스라엘을 통해 전 인류에 뿌려진 사탄의 영향력은 거치고, 오직 우주의 창조자 되신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대 반전이 일어날 것이다. 

모세의 등장처럼 예수님도 등장하실 것이다. 

그리고 초림의 등장처럼 재림도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 이름의 영광을 온전히 회복시키실 것이다. 

 

여섯 번의 재앙을 통해 충분히 학습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축과 종들을 들판에 두었다. 

우박이 내린다고 분명히 경고했음에도 사람들과 가축들을 들판에 둔다. 

하루 정도 집안에 두어도 될 일이다. 

경제적 이유일지 모른다.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이유가 어떠하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결국 소중한 생명을 잃는다.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라고 분명히 경고했음에도,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은 그 경고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동안 아론의 지팡이가 큰 역할을 했다면, 오늘은 모세의 지팡이가 역할을 감당한다. 

이제 지팡이는 노인의 보행 보조 도구를 넘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매개체가 된다. 

강력한 상징이 된다. 

과거에는 이렇게 강력한 상징이 되는 매개체가 신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안다. 막대기, 지팡이가 신이 아니라 그 매개체를 통해 역사하시는, 안보이긴 하지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진짜 “신”임을 말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말씀하시는 분이 계신다. 

그분을 두려워 하자. 그분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그분이 하시겠다고 하면 진짜 일어난다. 

그렇다고 그분을 피하지 말자. 두렵다고 무서워말자. 그분은 두려운 분 맞지만, 사랑스러운 분도 맞다. 

그분이 그걸 원하신다. 사랑과 자비와 은혜가 많으신 분. 

모든 걸 다 갖길 원하시는 그분은 어찌보면 욕심쟁이이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분의 존재가 그런 걸… 괜히 축소할 필요없다. 

 

고센 땅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박이 나무를 꺾고 동물들을 치는 모습을 본다. 

자신들의 땅만 괜찮고, 주변 마을들은 쑥대밭이 된다. 

하나님의 능력을 본다. 이제까지도 여섯 번의 재앙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는데, 이번 우박 재앙으로 그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 

이제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히브리 민족에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셨다. 

100여년 이상의 핍박과 고난의 시간을 겪어온 히브리 노예들. 

태어난 남자 아기를 죽여야 했던 민족. 

세계 최고의 노동 강도 때문에 죽어나가야 했던 사람들. 

이집트의 최대 약자들. 

그들은 이제 특혜를 입고 있다. 

특별한 은혜 속에서 그간의 설움과 아픔을 위로받고 있다. 

약한 사람들, 고난 받는 사람들, 힘 없는 사람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이름을 높이신다. 

 

약자 편에서 오랫동안 함께 했던 분이 세상을 떠났다. 

하나님 품에서 평안하시길, 

유가족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얻으시길.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여전히 약자들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더욱 힘 주시길… 

 

 

[오늘의 기도]

하나님, 죄송합니다. 

당신의 그 영광스런 이름이 너무 오랫동안 말도 안되는 인간들의 창조물에 가려 있었습니다. 

한갓 피조물들이 당신의 영광을 도둑질했습니다. 

주님, 당신께 영광을 돌립니다. 도둑맞은 당신의 영광을 다시 돌려드립니다. 

모든 우상은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약자들을 택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니 그 또한 감사합니다. 

강자들은 그 스스로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약자들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자들을 들어 쓰셔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주님의 방식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는 계획에 박수를 보냅니다. 

 

주님, 오늘도 약한 사람들을 세우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이런 일들을 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5 11 화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5-6월호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1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만 맥이 풀리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도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2 때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는 군지휘관이 사람 있었는데, 사람의 이름은 바아나요, 사람의 이름은 레갑이었다. 그들은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로서, 베냐민 사람이다. (브에롯 사람도 베냐민 족속으로 여김을 받았는데,

3 일찍이 브에롯 주민이 깃다임으로 도망가서, 오늘날까지 거기에 머물러 살고 있기 때문이다.)

4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는 다리를 저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이 이스르엘에 전해졌을 때에, 그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유모가 그를 업고 도망할 때에, 서둘러 도망하다가, 그가 떨어져서 발을 절게 되었다. 그의 이름이 므비보셋이다.

 

5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이 있는 왕궁으로 갔다. 그들은 한창 더운 대낮에 곳에 도착하였는데, 때마침 이스보셋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6 그들은 밀을 가지러 사람처럼 꾸미고, 대궐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찔러서 죽였다. 그런 다음에 레갑과 그의 동생 바아나는 도망하였는데,

7 그들이 대궐로 들어갔을 때에, 왕은 침실에서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잘라 수가 있었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가지고 나와, 밤새도록 아라바 길을 걸어서,

8 헤브론으로 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다윗에게로 들고 가서 말하였다. "임금님의 생명을 노리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를 여기에 가져 왔습니다. 주님께서 높으신 임금님을 도우시려고, 오늘에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벌을 내려서 원수를 갚아 주셨습니다."

 

9 그러나 다윗은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동생 바아나에게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 "온갖 죽을 고비에서 나의 생명을 건져 주신 확실히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10 전에,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에게 전하여 주고, 자기는 좋은 소식을 전한 것으로 여긴 자가 있었다. 나는 그를 붙잡아서, 시글락에서 죽였다. 이것이 내가 그에게 보상이었다.

11 하물며, 흉악한 자들이, 자기 침상에서 잠자는 어진 사람을 죽였으니, 내가 어찌 너희의 살인죄를 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나는 이제 너희를 땅에서 없애 버리겠다."

12 다윗이 젊은이들에게 명령하니, 젊은이들이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손과 발을 모조리 잘라 다음에, 그들의 주검을 헤브론의 연못가에 달아 매었다. 그러나 이스보셋의 머리는 가져다가, 헤브론에 있는 아브넬의 무덤에 묻었다.

 

주석
9-12: '레갑' '바아나' 다윗이 라이벌 왕을 죽인 대해 그들에게 보상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다시 , 그가 살해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는 소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만 했다. 그는 살해자들을 처형하고 이스보셋을 좋게 말함으로써 소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IVP 성경주석).

 

의지하고 있던 대상이 사라졌습니다. 이스보셋을 비롯한 백성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1). 바아나와 레갑은 살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 살필 여유도 없이, 그들은 단순한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깁니다(2-7). 이스보셋의 머리를 들고 다윗을 찾아갔지만, 결국 죽음의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8-12).

 

두려움과 불안은 사람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제대로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가만히 있을 없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 찾아오는 두려움과 불안, 취해야 마땅한 태도,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의지해야 바에 대해 묵상합시다.

 

——

 

자기 꾀에 넘어지다. 

바아나와 레갑은 군대 장군이었다. 아브넬이 총사령관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총사령관이 자기 군대를 배신하고 적군과 내통하다가 살해당했다. 

이제는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라인을 타야 한다. 대세가 어떻게 기울었는지 확인했다. 

방법은 다윗에게 이스보셋을 갖다 바치는 뿐이었다. 

원수의 수장을 갖다 바치면 다윗이 기쁘게 자신들을 맞이하여 벼슬을 알았다. 

사울 때부터 다윗을 쫓아 다녔다. 바아나와 레갑도 비슷한 임무를 여러 수행했을 것이다. 

다윗과 사울의 적대관계를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목을 가지고 가면 다윗이 그들을 용서하고 중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전장터에서 죽는 것보다 이렇게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봤다. 

 

그러나 이는 다윗에 대한 사전조사가 미흡했으며, 다윗을 오해했고, 다윗이 처한 정치적 환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내린 오판이었다. 

다윗은 사울, 요나단, 아브넬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조가를 부를 정도로 진심으로 슬퍼했었다. 

비록 정치적 선택이었다하더라도 다윗의 마음에는 진심의 아쉬움이 남아 있었으며 사실은 점점 대중에게 전달되었다. 다윗은 사울 집안을 존중하고 있으며 민족의 화해와 용서 그리고 통일을 바라고 있는 사람임이 널리 널리 전파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아나와 레갑이 과연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 그들도 듣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해석이 달랐던 것이다. 다윗의 진심에 대해 오해했다. 

다윗의 애가는 오로지 정치적인 제스처이며, 마음으로는 사울 왕가의 모든 자손들이 죽길 원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시던 이스보셋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겼다. 

다윗은 나중에 므비보셋을 자신의 식탁에 데리고 와서 함께 밥을 먹을 정도로 진심으로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원했다. 하지만 바아나와 레갑은 진심을 믿지 못했다. 

 

결국 자기 꾀에 넘어졌다. 

거사를 치르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지고 다윗에게 가져갔을 때만해도 의기양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알게 되었다. 

다윗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들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그들은 다윗의 진짜 의도와 진심을 모르기도 했고, 왜곡했다. 이렇게 사울 왕가는 자중지란으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방역수칙을 열심히 지켜온 우리는 수적 감소를 격하게 경험하고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생존 있을지도 모를 지경이다. 코로나 전에 비해 절반이 아니라 1/3 수준으로 급감했다. 아니 그보다 심각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른 C단체는 타격이 없고, 오히려 인원이 늘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마음이 심란하다. 

 

한국교회를 비판해왔다. 정부의 방역 지침에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했다.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이라고 주장하고 가르쳤다. 그런데 언제까지 오프라인 모임을 최소화할 있을까? 선제적으로 수칙을 정하고 국가의 정책을 따라 왔다고 본다. 그러나 신입생을 붙잡지 못하고, 모임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해서 결국 내년이나 내후년에 전국 멤버십이 500 이하로 떨어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역사적 해석을 내리겠는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마구마구 떠오른다. 

 

어느새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온다. 

그동안의 모든 생각과 선택과 결정이 과연 옳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두려움과 무거운 책임감이 든다고 해서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된다. 더욱 면밀히 살펴야 한다. 우리가 이런 결정들을 했는지, 그리고 때와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는지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 보자. 이웃을 위해 우리를 희생하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도를 벗어나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 이순간 나의 문제는 생각이 너무 단편적이라는 것이다. 

깊은 생각과 명석한 판단이 들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심과 예수님의 본심을 쉽게 오해할 있는 존재들이다. 

그분의 뜻과 생각을 없다고 믿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그분의 뜻을 깨달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본심을 이해하고 있는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게 달라고 요청드린다. 

 

함부로 결정하고 싶지 않다. 

주님의 인도를 구한다.  

꾀에 내가 넘어가지 말기를 기도한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 

 

——

예수님, 

저는 갑작스럽게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공동체가 결정했던 여러 가지 정책들이 설혹 우리 공동체를 사지로 몰아 넣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노예가 되지 않게 주세요. 

오직 주님의 주시는 평안 속에서 주닝의 인도를 받게 주세요. 

주께서 우리가 희생하길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야 것입니다. 

어떤 단체, 공동체건 하나님 나라에 잠시나마 기여하면 그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공동체가 되게 해주세요. 

 

저의 두려움을 제하시고, 오직 주님의 밝은 빛을 비춰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03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푸소서.

 

38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는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39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근쯤 가지고 왔다.

40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았다.

41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곳에, 동산이 있었는데, 동산에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무덤이 하나 있었다.

42 날은 유대 사람이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고,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유대 사람이 두려워 남몰래 조용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용기를 내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내려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38).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값비싼 몰향에 침향을 섞은 향료를 가지고 유대의 풍속을 따라 요셉과 함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십니다(39-42).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사람은 예수의 제자인 것을 나타내길 두려워했고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을 꺼려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장례를 위해 용기를 내어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하고 자신들의 소중한 것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섬깁니다. 우리에게도 혹시 이런 모습이 있습니까? 용기를 내어 주님을 섬겨야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지 살펴봅시다.

 

——

 

죽음의 폭로

 

1. 오늘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신 날을 기념한다. 동시에 제주 4.3 민중항쟁을 추념한다. 우주적인 죽음이 가져다 슬픔과 국가폭력의 희생이 가져다온 슬픔이 겹치는 날이다. 수많은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 인간사에 넘친다. 지도자의 욕망은 선량한 보통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것도 대량 학살로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들의 보편적인 죄를 폭로했다. 4.3 억울한 죽음들은 국가로 응집된 인간들의 죄를 폭로했다. 죽음은 진실을 폭로한다. 

 

 

2.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다. 

 

명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유대 사람들이 두려웠다.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히면서 살아갈 용기는 없었다. 예수님을 바로 곁에서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12제자들의 삶과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흠모했으며, 그분의 가르침에 깊이 탄복했다. 자신의 부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때문이었을까? 가족 때문이었을까? 명예였을까? 무엇이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다른 명은 요한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던 니고데모였다. 바리새인 유대인의 지도였던( 3:1) 니고데모는 영적인 궁금함으로 늦게 예수님을 찾아왔던 인물이었다.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없다는 말에엄마의 자궁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되느냐 상상력 넘치는 발언을 장본인이기도 하다. 번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섬기고 있었다. 십자가 죽음을 막지 못했음에 좌절을 느끼고 있었지도 모른다. 유대 지도자로서 전체 흐름을 바꾸고 싶었지만, 주류 기득권의 주장과 과격함을 이길 없었다. 어쩔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서 쳐다볼 밖에 없었다. 

 

자신의 마음의 진실을 드러내기에는 니고데모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몰약과 침향 ? 분명 아무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니고데모는 부가 있었다. 그는 명예/지위가 있었다. 예수님에게도 밤에 몰래 찾아오지 않았었나! 그의 지위는 그렇게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도자였지만, 대제사장은 아니었다.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히면 그의 지위와 명예가 순식간에 날아갈 수도 있었고, 그게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높다. 

 

3. 죽음의

 

아무리 두려움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그들 마음에 뜨거운 뭔가를 남겼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이 결국 무고한 죽음으로 귀결되었다는 죄책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당당함과 자신들의 비겁함이 대비되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의 순간 보인 하늘의 싸인이 그들의 마음속 동굴에 빛을 비추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은 빛이 되어 그들을 비춘다. 누구도 벗어날 없다. 빛이 들어왔다. 

 

 

4. 죽음의 폭로

 

빛은 인간의 심연을 폭로한다. 두려움, 비겁함, 합리화, 이중성 등등. 죽음의 빛이 빠르게 인간 존재를 드러낸다. 이상 숨길 수가 없다. 뜨거운 눈물이 심장을 적신다. 십자가의 잔상은 깊은 애도를 남기고 애도가 피를 끓게 한다. 숨겨 놨던 용기의 주위에 애도의 피가 둘린다. 결국 문이 열린다. 

 

빌라도를 찾아간다.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의 무덤을 그것도 무덤을 제공한다. 

비싼 향유를 드린다. 제자들에게 향유를 전달한다. 그리고 장례에 참여한다.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다. 

더이상 숨어지낼 없었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다온 급격한 변화였다. 

 

 

5. 자기 폭로의 시간

 

때로 강렬한 폭로의 시간이 찾아온다. 오랫동안 숨겨놨던 마음의 이중성, 충돌 되는 욕망, 손해 같은 두려움, 누리지 못할 즐거움,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예수님의 죽음 앞에 다시 돌아본다. 

 

4.3 사건의 무고한 희생도, 세월호 사건 꽃들의 죽음도 우리 인간들의 한계없는 욕망을 폭로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매년 되새기는 것은 나의 욕망이 폭주하지 않도록 미리 폭로하는 과정이다. 

생명과 평화를 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대의 흑암을 미리 정기적으로 폭로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 나는 어떤 심연을 주님께 드러낼 것인가?

 

 

——

예수님, 

 

당신의 죽음에 잠잠해 집니다. 

나도 모르게 폭주하던 온갖 부정적 감정들을 죽음이라는 영광의 앞에 노출시킵니다. 

열망/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저를 십자가 앞에 펼칩니다. 

주님의 피로 용기의 문을 열어 주소서. 

두려움을 이기고 더욱 정직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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