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 01일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1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2 그들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엮어냈습니다. 

3 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써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 이리하여 각하께서 이미 배우신 일들이 확실한 사실임을 아시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NIV

just as they were handed down to us by those who from the first were eyewitnesses and servants of the word(2절).

 

주석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1절) 누가복음은 하나님이 “우리 중에” 이루신 일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수백 년 혹은 수십 년 전 모세나 예수님 시대만이 아니라, 당시 저자를 비롯한 다른 신자들의 시대에 일어난 구원의 역사다(IVP 성경비평주석).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하나님이 ‘우리 중에 이루신 일들’을 정확하게 조사하여 써 보냅니다(1, 3절). 그 일들은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을 통해 소개된 ‘구원의 역사’입니다(2절). 이것은 데오빌로로 하여금 그가 이미 들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확실한 사실’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4절).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그 소식을 듣고 믿은 이들을 통해 전파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듣고 전하는 자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또 다른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 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리고 누구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오늘의 묵상]

기록은 안했지만, 말로 전달했던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예수님의 일화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여러 가지 버전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해도 전체적으로는 일관성을 지녔다. 

예수님에 대한 헛소문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반대하는 그룹에서도 악의적으로 거짓을 퍼뜨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분의 삶, 말씀, 십자가, 부활 그 모든 것에 대해 사실의 왜곡이 일어나기도 했다. 

말로 전달할 때 어쩔 수 없이 가감이 일어난다. 

과장과 감소가 일어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기록으로 남겨야 했다. 

그리고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만 전달될 것이다. 

기록이 회람될 때,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다면, 문제제기를 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함께 했던 수 많은 제자들과 증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교정, 수정되며 가장 많은 증인들의 동의를 얻은 글만 후대에 전달될 것이었다. 

 

말에 대해 언제나 약간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점점 말을 더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잘 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정확한 말을 가능하면 가감없이 솔직하게 잘 전달한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즉 말의 양이 어쩔 수 없이 많아져야 한다는 의미다. 

말을 정확하게 사용하려면 연습이 필요하고, 때로는 정확하게 외우는 것도 필요하다. 

그 정확한 어휘를 사용해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고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특히 시공간이 떨어져 있다면 그 필요성은 극대화된다. 

개인적인 대화야 눈빛과 몸동작으로도 소통이 가능하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고대의 경우 편지가 거의 유일한 소통의 방식이었다. 

말이 발화되고, 그것이 글이 되어 전달되어야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가능하다. 

 

지금은 그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화상통화가 가능한 시대에서는 글 만큼이나 말 자체의 중요성도 더욱 커졌다. 

과묵함보다는 말 잘하는 사람이 영향력을 미칠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사람들은 쉴새없이 말하고 말을 듣는다. 

글을 읽고 글을 쓴다. 

그 속에서 듣고 읽을 만한 내용의 말과 글을 생산해 내는 것이 실력이다. 

챗GPT와 견주어 이길 수 있는 힘은, 말하는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포함된 글과 말이다. 

기계는 인생을 대체할 수 없다. 

인생의 경험은 각자마다 고유하여 기계가 반복하기 불가능하다. 

인생 경험의 이야기가 담겨 정직한 말하기와 글쓰기가 이뤄진다면 인공지능과 겨뤄볼 만하다. 

픽션은 GPT가 훨씬 뛰어난다. 

그러난 논픽션을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삶의 희노애락이 말과 글로 담길 때, 그것은 현실이며 실제이기에 힘이 실린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교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교리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삼위일체 교리로 살아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욱 흥미를 끈다. 

논리적 글 자체는 챗GPT가 뛰어나겠지만, 사실과 현실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개인의 삶이 더욱더 드러나야 인공지능과 붙어볼만하다.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많을수록 영향력 있는 글과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얄팍함…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나의 존재적 고민이다. 

깊이가 부족하다는 느낌. 

최소한 예수님에 대한 경험에서만큼은 얄팍함을 넘어서고 싶었다. 

두터움, 깊이, 풍성함, 견고함, 흘러넘침을 내 안에 채우고 싶었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존재감으로 사람들에게 평안과 안식과 지혜와 통찰을 주고 싶었다. 

허나, 지금은 그 일에 실패한 듯 보인다. 

가볍다. 얄팍하다. 표피적이다. 

언제 그 깊이로 들어갈 수 있을까? 

과연 들어갈 수나 있는 걸까? 

 

누가처럼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 깊이 있게 전달하고 싶다. 

말하고 글을 쓰고 싶다. 

예수님에 대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예수님의 소망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이고 싶다. 

 

 

[오늘의 기도]

무한한 깊이와 신비의 하나님, 

저는 주님의 깊이를 닮고 싶었습니다. 

거룩함의 깊이, 사랑의 깊이, 사랑의 깊이가 더욱 두터워지길 바랬습니다. 

지식의 넓이, 지혜의 풍성함, 기술의 고도화를 갖추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전문가로서 사람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말씀의 전문가, 기도의 전문가, 상담의 전문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어쩌면 행사와 이벤트의 전문가가 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도 다시 평가해보니, 어설픈 전문가지요. 

주님, 저의 얄팍함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더 늦기 전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사람들을 더 잘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회피하지 않게 하소서. 

계획하기를 미루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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