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1월 31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바로는 고집이 세서, 백성들을 내보내기를 거절하였다.

15 그러니 너는 아침에 바로에게로 가거라. 그가 물가로 갈 것이니, 강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만나거라. 너는 뱀으로 변했던 그 지팡이를 손에 들고서,

16 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나를 임금님께 보내어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어 그들이 광야에서 나에게 예배하게 하라, 하셨는데도, 임금님은 아직까지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17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주님께서 친히 주님임을 임금님께 기어이 알리고야 말겠다고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쥐고 있는 이 지팡이로 강물을 치면, 이 강물이 피로 변할 것입니다.

18 강에 있는 물고기는 죽고, 강물에서는 냄새가 나서, 이집트 사람이 그 강물을 마시지 못할 것입니다.'"

19 주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아론에게 이르기를, 지팡이를 잡고 이집트의 모든 물 곧 강과 운하와 늪과 그 밖에 물이 고인 모든 곳에 손을 내밀라고 하여라. 그러면 그 모든 물이 피가 될 것이며, 이집트 땅 모든 곳에 피가 괼 것이다. 나무 그릇이나 돌 그릇에까지도 피가 괼 것이다."

 

20 모세와 아론은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하였다. 그가 바로와 그의 신하들 앞에서 지팡이를 들어 강물을 치니, 강의 모든 물이 피로 변하였다.

21 그러자 강에 있는 물고기가 죽고, 강물에서 악취가 나서, 이집트 사람들이 그 강물을 마실 수 없게 되었다. 이집트 땅의 모든 곳에 피가 괴었다.

22 그런데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자기들의 술법으로 그와 똑같이 하니,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로가 고집을 부리면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23 이번에도 바로는 이 일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발길을 돌려서 궁궐로 들어갔다.

24 이렇게 하여서 강물을 마실 수 없게 되니, 모든 이집트 사람은 마실 물을 찾아서 강 주변에 우물을 팠다.

25 주님께서 강을 치신 지 이레가 지났다.

 

주석

강물을 치니, 강의 모든 물이 피로 변함(20절) 많은 사람이 열 재앙을 이집트의 신들에 대한 명확한 공격으로 본다. 나일 강은 이집트의 생명줄이었다. 농업과 궁극적인 생존은 6,611킬로미터에 달하는 강을 따라 비옥한 흙을 퇴적시켜 주는 주기적인 홍수에 의해 좌우되었다(IVP 배경주석).

 

주님께서 모세에게 고집 센 바로에게 가서 강물이 피가 되는 재앙을 예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아론의 지팡이를 통해 강물이 피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14-19절). 주님의 말씀대로 강물이 피가 되어, 물고기가 죽고 악취가 납니다(21절). 이집트 사람들은 물을 마실 수가 없어 우물을 팝니다(24절). 그럼에도 바로는 고집을 부리며 듣지 않습니다(22절). 

 

이집트의 생명줄인 나일 강이 피가 되었습니다. 첫째 재앙은 나일 강을 관할한다고 믿었던 이집트 신을 심판하는 것이었습니다(20절). 이집트 사람들은 생명줄처럼 의지했던 것으로부터 오히려 곤경을 겪습니다(24절). 첫째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으로 느껴집니까?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도 고집스러운 바로처럼, 나의 마음이 무감각하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묵상]

충격 그 자체다. 

어떤 영화가 떠오른다. 

피를 뒤집어 쓴 영화다. 

확인해보니 영화 캐리였다. 내가 본 것은 2013년 클로이 모레츠가 캐리역을 맡은 영화였지만, 조사해보니 1976년 원작이 있었다. 

https://rayspace.tistory.com/1279

그런데 강물이 피가 되면, 강에서 놀던 아이들은 온통 피범벅이 된다.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부모들은 놀라고 아이들은 경기한다. 

나일강은 그들에게 생명줄이며 젖줄이다. 

파라오가 파라오가 될 수 있는 이유다. 

이집트가 거대한 왕국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생산성을 극대화되어 잉여 생산물을 만들 수 있는 근원이 바로 나일강의 정기적 범람이었다. 

강을 중심으로 마을과 도시들이 발달한다. 

강을 중심으로 물건과 상품들을 교류된다. 

그 강이 죽음의 강이 되었다. 

물고기가 죽는다. 

푸른색이 아니라 붉은 색으로 상류에서 하류로 거대한 강이 흐른다. 

저주다. 

보고도 믿을 수 없다. 

 

나일강의 신들이 있었을 것이다. 

강이 피가 되었다는 것은 나일강의 신들의 죽음을 상징한다. 

더 나아가 이집트 신들의 죽음을 상징한다. 

이집트를 보호한다고 믿었던 모든 신들이 나일강에서 죽었다. 

아마 큰 전쟁이 나서 강 상류에서 대대적인 도륙과 살륙이 있으면 강의 색이 피빛으로 물들기도 했다. 

강이 피가 된다는 것은 신의 죽음을 넘어 실제적인 전쟁의 위협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불안이 극에 달한다. 

백성들의 불안은 곧 나라의 위기며 리더들의 위기다. 

 

피로 변한 나일강이 가장 충격적이며 오늘 장면의 전체를 뒤덮지만, 이상하게도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이 아론의 지팡이를 지목하신 것이다. 

이적을 행하는 지팡이는 아론의 지팡이라는 점이 자꾸 거슬린다. 

왜 모세의 지팡이를 쓰지 않으시는가? 

왜 아론의 지팡이가 이토록 눈에 띄게 등장하는가? 

뱀으로 변한 것도 아론의 지팡이였다. 

나일강을 피로 만드는 것은 아론의 지팡이였다. 

반면, 홍해를 가를 때는 모세의 지팡이가 역할을 한다. 

광야에서 바위를 내리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할 때는 모세의 지팡이였다. 

 

찾을 수 있는 한 가지 의미는 아론의 리더십의 확립이다. 

아론은 제사장으로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모세는 왕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겠지만, 아론은 앞으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아론의 리더십을 세워야 한다. 

리더십의 확립은 그의 지팡이를 통해서 진행된다. 

아론이 그의 지팡이를 높이 들 때, 사람들은 지팡이를 통해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 재앙_장자의 죽음 재앙도 사람들의 입에 언제나 오르내리겠지만, 첫번째 재앙도 만만치 않다. 

나일 강이 피가 되는 재앙이 일어난 계기가 바로 아론의 지팡이라는 점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제사장으로서의 권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래서 이적이 일어나는 그 지팡이 상징에서부터다. 

 

파라오의 술사들도 이와 비슷한 마술을 펼쳤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 저자는 파라오 술사들의 마술과 첫번째 재앙의 차이를 그 스케일에서 찾는 듯 싶다. 

25절이다. “주님께서 강을 치신 지 이레가 지났다.”
7일간 영향을 주었다. 

하루 이틀이었다면 주변의 우물을 굳이 파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상의 날들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강 주변에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우물 파는 작업이 쉬운 작업은 아니었을 터, 따라서 7일간에 걸쳐 강물은 여전히 원래 색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의 강이 약 7일간 흐른다. 

술사들의 마술은 그렇게까지 할 수가 없다. 

순간적으로 색깔을 바꾸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색료를 몰래 뿌린다던가 무슨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날 며칠을 죽음의 강으로 만드는 방법을 그들이 알 수도 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압도적인 비주얼이 며칠간 이집트를 휘감싼다.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일하실 때가 있다. 

물론 모세에게 찾아가시고, 아론을 불러오시는 그 모든 과정에 하나님은 일하셨다. 

그 일도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본격적으로 거대한 스케일, 압도적 비주얼의 일을 하신다.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된다. 히브리 신의 능력을, 히브리 신의 스케일을… 

그분을 찬양하고 예배해야 한다는 말은 그냥 환상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다. 

백성들의 종교성을 달래기 위함이 아니다. 

위대하신 분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다. 

자연을 주관하시는 분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다. 

 

큰 규모의 수련회를 준비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길 기도한다. 

단순히 우리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심리적 회복차원을 넘어, 

압도적이고 거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수련회면 참 좋겠다. 

그분의 경이롭고 위대하심을 아이맥스로 보고 듣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일상의 작은 순간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큰 스케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런 날이 오길 바라고 또 바란다. 

 

아론의 지팡이가 어디있더라? 

 

 

[오늘의 기도]

위대하신 주님, 

거대한 스케일, 압도적인 비주얼의 하나님, 

당신이야 말로 미친 CG를 현실로 보여주셨습니다. 

나일강을 피로 물들이셨듯이, 예루살렘을 피와 어둠으로 채색하셨습니다. 

나일강의 피가 이집트에 국한된 영향을 주었다면, 예루살렘의 피와 어둠은 온 세상, 온 우주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오늘도 십자가를 찬양합니다. 

당신의 그 놀라운 역사를 찬양합니다. 

그 놀라운 일들을 오늘도 보여주소서. 

우리의 삶 가운데 치고 들어오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17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 그러나 모세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저의 말을 듣지 않고, '주님께서는 너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 하면 어찌합니까?"

2 주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대답하였다. "지팡이입니다."

3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을 땅에 던져 보아라."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되었다. 모세가 그 앞에서 피하니,

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손을 내밀어서 그 꼬리를 잡아라." 모세가 손을 내밀어서 꼬리를 잡으니, 그것이 그의 손에서 도로 지팡이가 되었다.

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렇게 해서 이적을 보여 주면, 주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너에게 나타난 것을 믿을 것이다."

 

6 주님께서 또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손을 품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모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어서 보니, 그 손에 악성 피부병이 들어서, 마치 흰 눈이 덮인 것 같았다.

7 주님께서 "너의 손을 품에 다시 넣어 보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다시 품에 넣었다가 꺼내어서 보니, 손의 살이 본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8 "그들이 네가 하는 말도 믿지 않고, 첫 번째 이적의 표징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두 번째 이적의 표징은 믿을 것이다.

9 그들이 이 두 이적도 믿지 않고, 너의 말도 믿지 않으면, 너는 나일 강에서 물을 퍼다가 마른 땅에 부어라. 그러면 나일 강에서 퍼온 물이, 마른 땅에서 피가 될 것이다."

 

주석

뱀(3절), 악성 피부병(6절) 바로를 나타내는 상징은 뱀 형상의 휘장으로 그것은 왕관에 툭 튀어나오게 달려 있었다. 첫 번째 표적은 바로의 권위가 완전히 하나님의 권위 안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피부병은 성경에서 일관되게 오만에 대한 처벌-어떤 사람이 교만 때문에 하나님이 임명하신 사람에게 주제넘게 굴 때-로 여겨지며, 따라서 여기서 바로를 벌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 준다(IVP 배경주석). 

 

모세는 동족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 봐 걱정합니다(1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다시 돌아오게 하는 능력과 악성 피부병이 생겼다가 다시 회복되는 능력을 주십니다(2-7절). 첫 번째 이적이 부족하면 두 번째 이적으로, 이것으로도 부족하면 나일 강물이 피가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모세를 도우실 것입니다(8-9절).

 

이집트를 떠나 40년 동안 양치기의 일상을 살았던 모세에게, 다시 이집트와 맞서서 동족들을 구원할 임무는 너무나 커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손으로 바로의 수호자인 뱀을 움켜잡아 심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또 다른 능력을 더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능력을 주시고 도우실 것을 신뢰합시다.

 

[오늘의 묵상]

모세의 질문은 정당하다. 

4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모세의 의분에 찬 행동에 동족들은 의심했다. 

그 실패의 경험도 크거니와 사실은 40년의 세월이 더욱 큰 문제였다. 

이제는 젊은 날의 패기도 체력도 아니다. 

그저 양 떼를 모는 목자였을 뿐. 

과연 몇십만명에 이르는 히브리 민족을 이끌 수 있을까? 

과연 큰 왕국 이집트의 바로에게 맞서서 민족의 탈출을 설득할 수 있을까? 

모세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라기보다는 ‘동족’이었다. 

동족의 불신을 우선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동족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이 필요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봤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래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면 어쩌겠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시 생각해봐도 정당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대체로 정당하다. 

왜냐하면 사람으로서는 그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많고, 지인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해야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갈 것을 상상하고 추측하면 고난의 길이 그려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브라함이 그랬다. 여호수아가 그랬다. 예레미야, 에스겔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물을 수 밖에 없다. 왜 나냐고, 과연 할 수 있는 일이냐고… 

묻지 않고 따르는 것이 정답이라고 강요할 수 없다. 

오히려 묻는 것이 인간적이고 자연스럽다. 

 

사역자로의 부르심, 간사로의 부르심에 크게 묻지 않았던 지난 시간들이 생각난다. 

사실 사역자로의 삶이 엄청나게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모종의 특권의식과 교만함이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순수함 속에 뿌려져 있었던 것 같다. 

못하겠다는 생각보다, 나를 이렇게 부르시니 감사하다는 생각이 좀더 크게 작동했던 것 같다. 

그러니 모세처럼 매우 진지하게, 여러 차례 묻지는 않았다. 

앞으로의 삶이 두렵다거나 못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과연 이 부르심이 정확한 것인가, 내가 이 부르심을 제대로 인지한 것이 맞나에 초점을 두고 기도하고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왜 나여야만 하는가?’, ‘과연 이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도 더욱 심도있게 드렸어야 했다. 

그게 인간적이다. 

질문은 불순종이 아니라 진지함의 산물이다. 

질문은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의 표현이다. 

질문은 인간 내면 중심의 두려움에 대한 인정이다. 

그래서 인간적이다.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응대하신다. 이미 알았다는듯이….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라 하셔서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하필 뱀이다. 

주석에서는 뱀이 바로를 상징한다고 한다. 

창세기에서 뱀은 사람을 유혹하여 인류 전체를 죄악으로 이끌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셨다. 여자의 후손으로 하여금 뱀의 머리를 밟게 하겠다고 말이다 (창 3:15). 

그 후손 중에 하나인 모세는 뱀의 꼬리를 잡았다. 

그리고 더 미래의 후손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뱀의 머리를 짓밟으셨다. 

바로의 상징이 뱀이라는 사실이 그저 놀랍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속 사회의 절대 권력이 뱀으로 표현된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뱀을 숭앙하고 숭배한다는 점이 신기하고 놀랍다.

하나님은 뱀을 사단의 상징으로 인류 타락의 주범으로 여기시며, 그 뱀(사단)을 무찌르는데 성경 전체 이야기를 할애 하신다. 

요한계시록에도 뱀이 등장하고, 뱀 중에 큰 뱀인 용을 잡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모세 혼자서는 뱀을 제어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도우셔야 뱀을 제어할 수 있다. 

뱀은 언제든지 자신의 요상한 언어와 논리로 사람들을 미혹케하고 현혹시키고 죄로 이끈다. 

정당화의 천재가 뱀이다. 

간교한 말로 하나님께 반역케 하는 존재다. 

겨우 몇십년을 살아가는 인간은 뱀의 말에 속기 십상이다. 

마음 속에 뱀의 생각과 논리가 들어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전파와 와이파이를 타고 그의 말들이 언어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과연 우리 인간이 잘 거를 수 있는가? 

과연 내가 잘 스크린 할 수 있는가?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체력과 지력은 달리고, 욕망과 욕구는 지나치다.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매일 매일 그분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변화가 많은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변화가 많으면 말이 많다. 변화를 설명하는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하다. 

그 소리 속에 뱀의 소리도 들어있다. 

양떼를 치는 것은 모세 혼자서도 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뱀을 제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더욱 절실한 이유다. 

 

문명의 기원은 물이며 강이다. 

나일강이 이집트 문명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이 많아야 사람들이 모인다. 강이 넘쳐야 땅이 비옥하다. 

많은 사람들, 비옥한 땅, 넘쳐나는 생산물, 교환하려는 욕구… 

이래야 문명이 탄생한다. 

 

그러나 언제든 그 문명은 피로 물든다. 

문명의 중심에는 그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언제든 물고 뜯고 찢는다. 

전쟁이 그치지 않으며, 죽음이 멈추지 않는다. 

뱀이 그 문명에 중심에 있다. 

요상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서로 싸우게 하고 결국엔 자신의 왕국을 유지한다. 

그 문명은 사람들의 피로 건설되었다. 

 

하나님은 나일 강이 더이상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생명의 강이 아니라, 

죽음의 강이 되게 하실 수 있음을 이적을 통해 드러내신다. 

뱀의 실체, 문명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셔서, 문명의 사람들과 그를 대표하는 바로가 어떻게 하나님을 반역해왔는지 보여주신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부어지는 것이다. 

나일강의 물이 피가 되는 이적을 봐야 사람들이 모세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 

최소한 동족 히브리 사람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바로의 욕망을 꺾는데는 그걸로는 안되었지만 말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거대 문명이 가져다주는 폭력과 죽음을 폭로하신다. 

전쟁은 전 세계에 생중계된다. 

물이 있는 곳에, 원유가 있는 곳에, 핵이 있는 곳에, 사람들의 욕망이 쌓이는 곳에 폭력과 죽음이 피로 물든채 퍼진다. 

CNN, BBC를 통해 유툽과 각종 SNS를 통해 피로 물든 나일강, 피로 물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라이브로 보여준다. 

여전히 권력가들은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권력의 달콤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게 자신들의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는 뱀의 간교한 거짓말이다. 

 

세계에는 모세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모세의 등장이 절실하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진정한 모세는 예수님이며, 그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작은 예수, 작은 모세라는 사실을 말이다. 

피조물들의 신음은 더욱 커저가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의 등장은 왜 작아 보이는가? 

오늘의 질문이다. 

 

 

[오늘의 기도]

사단을 결박하시는 하나님,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님,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시는 성령님, 

삼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합니다. 

저를 부르셨으니, 모세에게 주셨던 능력과 권세를 허락하소서. 

뱀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간교한 말과 거짓의 언어를 분별할 수 있는 귀를 주소서. 

피로 더럽혀진 인간사에 무조건적 애정이 아닌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부담스런 회의를 앞두고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우리 모두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해 눈과 귀가 어두워지지 않도록 도우시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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