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2월 23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1 "주님께서, 당신들과 당신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당신들을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이르게 하셔서 그 땅을 당신들에게 주시거든,

12 당신들은 태를 처음 열고 나오는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십시오. 그리고 당신들이 기르는 짐승이 처음 낳는 수컷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13 그러나 나귀의 맏배는 어린 양을 대신 바쳐서 대속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대속하지 않으려거든, 그 목을 꺾으십시오. 당신들 자식들 가운데서 맏아들은 모두 대속하여야 합니다.

14 뒷날 당신들 아들딸이 당신들에게 묻기를,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하거든, 당신들은 아들딸에게 이렇게 일러주십시오.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15 그 때에 바로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처음 난 것을, 사람뿐만 아니라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셨다. 그래서 나는 처음 태를 열고 나온 모든 수컷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서, 아들 가운데에서도 맏아들을 모두 대속하는 것이다.

16 이것을 각자의 손에 감은 표나 이마 위에 붙인 표처럼 여겨라. 이렇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다.'"

 

주석

초태생을 제물로 바침(12-16절) 초태생 가축은 야웨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제물로 바쳤으나, 나귀는 제물로 바칠 수 없었다. 아마도 나귀는 짐을 실어 나르는 동물로서 중요하기 때문에 제물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귀는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구제되고 그 대신 다른 제물이 드려졌다(IVP 배경주석). 

 

태를 처음 열고 나오는 모든 것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나귀와 사람의 처음 난 것은 어린양으로 대속, 즉 다른 제물로 바치는 것이 가능합니다(12-13절). 초태생을 봉헌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바로의 고집을 꺾기 위해 이집트 땅의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셨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대속으로 초태생 죽음의 재앙을 모면한 이스라엘 백성은, 앞으로도 동물들의 초태생을 바치는 것을 통해 맏아들을 대속해야 합니다(15절).

 

처음 난 것을 죽이는 하나님의 열 번째 재앙은 이집트에게는 죽음과 심판이요, 이스라엘에게는 생명과 구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구원은 ‘어린 양의 피’라는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대속’은 하나님이 대리 지불을 허용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희생을 통해 누군가를 살리는 것입니다. 가정과 공동체에서 내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며 헌신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기도해 보고 실천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대속하는 이유는 기억에 있다. 

죄에 대한 대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증표로서의 대속이다. 

맏아들과 맏나귀가 죄가 있어서 그들을 대신해서 어린 양을 대신 제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소유라는 사실을 자신과 가족과 공동체 전체에 공표하는 예식으로서 대속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적 예식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기념한다. 

절기를 통해서도 기억과 기념의 활동이 일어난다. 

동시에 각 가족마다 첫째가 때어날 때마다 대속의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그 때마다 가족 구성원 모두와 마을 공동체 전체가 대속 제물로 바쳐진 어린 양의 고기를 먹으면서, 기억과 기념의 활동이 일어난다. 

이제 모든 가족의 첫째는 마을 전체가 인정하는 하나님의 것이 된다. 

그 첫째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마을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환영받고 환대받았기 때문에,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진다. 

이런 독특한 역할 규정으로 인해 가족과 공동체를 영적으로 이끄는 리더가 된다. 

모든 자녀들이 마을 공동체로부터 환영받겠지만, 특히 첫째의 존재는 더욱더 부각된다. 

가족과 마을의 영적 리더로서 성장하게 된다. 

기억의 재생, 영적 교육의 중추, 하나님 중심의 삶에 대한 기준 제시 등등

첫째의 역할은 축복이자 부담이 된다. 

공동체로부터 격한 환대와 축복을 받지만, 동시에 가족과 공동체를 영적으로 이끌어야 하는 부담을 느낀다. 

첫째의 첫째도 그렇겠지만, 둘째 셋째 집의 첫째도 마찬가지다. 

 

첫째 아들을 바쳐야 한다는 이 말씀 때문에/덕분에 나는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바 되었다. 

우리 부모님은 말씀을 문자 그대로 삶에 적용하는 보수적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셨다. 

첫째 아들을 드려야 한다는 말씀의 적용은 나를 목사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고, 실제로도 천 번의 새벽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나를 드리셨다. 

축복과 부담. 이 두 가지를 나는 항상 느꼈다. 

많은 교인들의 축복과 환대를 받았다. 동시에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다. 

더욱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위적 삶의 무게가 오랫동안 마음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가난한 집 맏아들로서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종교적, 영적 역할도 감당해야 했다. 

착해야 했고, 순종적이어야 했고, 탁월해야 했다. 

공부도, 교회 생활도, 사회적 관계도… 

어렸을 때부터 어른처럼 살아야 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성인 아이가 되었던 것이다. 

사춘기 시절에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모범생, 공부, 운동, 찬양 잘하는 교회오빠 스타일이 되어갔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해결되지 않는 정서적 정신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착한 아이 컴플렉스… 

 

좋은 점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부작용이 있었음도 부인하고 싶지 않다. 

정신적, 정서적 무게가 항상 부담이었다. 

 

위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핵심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역을 기억하고, 그분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소유라는 사실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하는 것이다. 

고대 사회는 첫째를 드림으로써 그렇게 했다면,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절기와 제사를 통해 세대간 교육 및 전수가 있었다면, 지금은 매주 예배과 교회 교육을 통해, 매일 이뤄지는 경건의 시간과 소그룹 나눔을 통해 일어난다. 

한 명에게 모든 영적 부담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 

영적으로 이끄는 목사에게도 모든 부담과 역할을 맡기지 않는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삼으셨다. 

목사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평신도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첫째를 대속하는 마음으로 가정과 공동체를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역사를 기념하고, 그분의 소유됨을 기뻐하고, 그분의 뜻을 수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첫째를 대속하는 마음으로… 

그 진지함으로… 

 

[오늘의 기도]

당신의 일을 기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당신이 하신 인류 구원과 구출의 사건을 기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첫째를 드림으로써 과거의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매일 첫마음을 드림으로써 지금의 우리가 그렇게 하게 하소서. 

나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일에 사용하여 주소서. 

주님의 뜻이 이뤄지는 일에 사용하여 주소서. 

 

게으름을 이기게 하시고, 

더욱 부지런히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을 기념하고, 사람들을 교육하고, 함께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도우소서. 

 

오늘도 첫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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