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6월 19일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21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주님의 명성에 어울리게 나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사랑은 그지없으시니, 나를 건져 주십시오.

22 나는 가난하고 빈곤합니다. 내 마음이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23 나는 석양에 기우는 그림자처럼 사라져가고, 놀란 메뚜기 떼처럼 날려 갑니다.

24 금식으로, 나의 두 무릎은 약해지고, 내 몸에서는 기름기가 다 빠져서 수척해졌습니다.

25 나는 사람들의 조소거리가 되고, 그들은 나를 볼 때마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멸시합니다.

26 주, 나의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한결같으신 사랑을 따라,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27 주님, 이것은 주님께서 손수 하신 일이며, 바로 주님이 이 일을 이루셨음을 그들이 알게 해주십시오.

28 그들이 나에게 저주를 퍼부어도, 주님은 나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들은 치려고 일어났다가 부끄러움을 당하여도, 주님의 종은 언제나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29 나를 고발하는 사람들은 수치를 뒤집어쓰게 해주시고, 그들이 받을 수모를 겉옷처럼 걸치고 다니게 해주십시오.

30 내가 입을 열어서 주님께 크게 감사드리며,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련다.

31 나를 고발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해 주시려고, 주님께서는 이 가난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 계시기 때문이다.

 

ESV

For He stands at the right hand of the needy,

To save him from those who judge his soul(31절).

 

[오늘의 묵상]

** 나는 가난하고 빈곤합니다.  

시인의 자기 인식이다. 

가난하고 빈곤하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시인이 가난하고 빈곤하다고 할 때, 그것은 마음의 가난함이나 빈곤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시인은 가난해서 먹을 것이 많지 않고, 입을 것이 별로 없다. 

그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간다. 

석양의 그림자처럼 사그라들어간다. 

하루살이들의 발버둥이 그들의 일상이다. 

겨우겨우 먹고 살고 있다. 

금식은 자발적이지 않고 어쩔 수 없을 때가 많다. 

가난하고 빈곤하니 사람들의 놀림 거리가 되곤한다. 

 

어렸을 적, 가난으로 인해 주눅들었던 적이 종종 있었다. 

가난한 집의 도시락을 선생님께 갖다드리기가 부끄러워서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다가 결국엔 못가져드린 적이 있다. 

당시 소풍 때, 반장이 선생님의 도시락을 챙겨드리는 게 의무였다. 

파출부 어머니가 주인 집 아들내미의 짜증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것이 서러웠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편지를 써야 했는데, 그게 부끄러웠다.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어려웠다. 

천호동으로 놀러가자는 친구들의 초대를 정중하게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엇나가지는 않았지만, 가난이 싫었던 것은 사실이다. 

 

어렸을 적, 기도를 참 많이 했다. 

가난을 극복하게 해 달라는 기도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친구들의 전도를 위해 기도했었다. 

목사님이 기도제목을 내놓는 대로 기도했다. 

기도제목은 거창하고 정당했지만, 내면은 그렇지 못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반지하방에서 지상으로 올라가게 해달라고 마음으로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부모님의 수치를 덜어드리고 싶었다. 

때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우리 부모님이 수치를 당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도로 내 뱉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는 그렇게 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때, 오늘의 시편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이 시편의 기도로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기도 방식으로 알고 있었다면, 나도 시인처럼 기도했을 것이다. 

우리 가정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수치를 주는 사람들을 벌하여 달라고, 

그들을 혼내 달라고… 

 

지금은 솔직히 그렇게 가난하지도 빈곤하지도 않다. 

도리어 과거에 비하면 풍족하다. 

그것은 그것대로 정말 감사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눈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가난하고 빈곤한 자들에게로 향하는 것이 맞다.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통로가 되는 것이 맞다.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시선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 

그 하나님의 시선이 지금 가난하고 빈곤하여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해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사람에게 향하고 있다면, 내 시선도 그렇게 향해야 할 것이다. 

 

내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라 억지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마음이 가난한 것과는 별개로 실제로 가난하지 않은데 시인에게 감정이입을 위해 나 스스로를 가난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다만, 나도 언제든지 가난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이가 더 들면 더 가난해 질 수 있다. 

노후를 충분히 준비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 

분명 완벽한 준비, 충분한 준비를 할 수는 없다. 

주님께 맡기는 수밖에.. 

어쨌든, 언제든지 가난해 질 수 있으며, 언제든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당할 수 있다. 

나를 저주하는 사람도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 

그 때, 이 시를 떠올리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도, 악인들에 대한 처벌을 간곡히 요구하는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예시가 바로 이 시다. 

이 시편을 따라 기도할 수 있다. 

마음의 고통을 주님께 토로할 수 있다. 

언제가 되든, 그 날에도 난 주님께 기도할 것이다. 

주님이 해결해 주시길 간구하며… 

 

[오늘의 기도]

주님, 저의 가난함과 빈곤함을 굽어 살펴주셔서, 부요함과 풍족함으로 이끄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가진 자원을 하나님의 시선을 따라 흘려보내게 하소서. 

제가 가진 인적자원을 하나님의 관심을 따라 공유하게 하소서. 

제가 주신 소명을 잘 감당하도록 오늘 하루도 인도하소서. 

건강이 필요합니다. 

건강을 읽으면 주신 소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제가 할 일이 남아 있음을 느낍니다. 

그 부르심을 더 깊이 더 잘 알아차리고, 행동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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