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2월 29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4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자,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시여!”15 엘리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활과 화살을 가져 오십시오.” 그가 활과 화살을 가져 오자,16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말하였다. “활을 잡으십시오.” 그가 활을 잡으니, 엘리사가 그의 손 위에 자기의 손을 얹었다.17 엘리사가 말하였다. “동쪽 창문을 여십시오.” 왕이 창문을 열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쏘십시오.” 그가 활을 쏘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주님의 승리의 화살입니다. 시리아를 이길 승리의 화살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아벡에서 시리아를 쳐서, 완전히 진멸하실 것입니다.”18 엘리사가 또 말하였다. “화살을 집으십시오.” 왕이 화살을 집자,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말하였다. “땅을 치십시오.” 왕이 세 번을 치고는 그만두었다.19 하나님의 사람이 그에게 화를 내며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대여섯 번 치셨으면 시리아 군을 진멸할 때까지 쳐부술 수 있었을 터인데, 고작 세 번입니까? 이제 임금님께서는 겨우 세 번만 시리아를 칠 수 있을 것입니다.”20 그런 다음에 엘리사가 죽으니, 거기에 장사하였다.

그 뒤에 모압의 도적 떼가 해마다 이스라엘 땅을 침범하였다.21 한 번은 장사지내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주검을 묻고 있다가, 이 도적 떼를 보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그 주검을 엘리사의 무덤에 내던지고 달아났는데, 그 때에 그 사람의 뼈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그 사람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섰다.

 

메세지 

엘리사가 말했다. “이제 동쪽 창문을 여십시오!” 왕이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엘리사가 말했다. “쏘십시오!” 왕이 활을 쏘았다. 엘리사가 큰소리로 말했다. “하나님의 구원의 화살입니다! 아람에게서 구하시는 화살입니다! 아람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왕께서 싸울 것입니다.”(17절) 

 

주석

14절. 14절에서 왕이 한 말은 엘리야가 떠날 때에 엘리사가 한 바로 그 외침(왕하 2:12)을 반복하는 것이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엘리사의 죽음이 기록되었다. 

엘리사는 능력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능력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오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여호아스가 엘리사의 죽음 앞에 울고 있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오는 것이었다. 

시리아 군대의 도전 앞에 일시적으로 하나님을 찾았을 수는 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앞선 본문에서 이미 이뤄졌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으며,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갔다. 

엘리사의 죽음에 애도하기 전에, 그 엘리사가 어떤 삶을 살라고 말했는지를 깊이 숙고했어야 했다. 

 

엘리사는 선지자 학교를 만들고, 많은 선지자 혹은 예언자들을 길러냈다. 

오늘날 신학교를 만들고 많은 목회자를 배출한 것에 비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시대를 흐름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이킬 수 없었다. 

이것이 엘리사의 슬픔이었다. 

수많은 이적을 행하고, 새로운 세대를 일으키고, 종교개혁자를 배출했음에도 왕들의 악행을 막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여러 차례 구원해 주셨지만, 그 때 뿐이었다. 

왕도 백성도 하나님을 참 쉽게 잊어 버렸다. 

엘리사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여러 회한을 느꼈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의 죄악을 막을 수 없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모습에 좌절했을 것이다. 

 

현대인들 속에서 사역하는 많은 사역자들의 마음이 이러할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역사를 알지만,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을 떠나간다. 

특히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멀리한다. 

숱한 노력과 전략적 수고도 잘 작동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교회에 실망했으며, 생존을 위해 무한 경쟁 속에 살고 있고, 그 스트레스를 다른 즐거움에서 찾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그나마 출석하던 소수의 중고등학생들도 교회에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몇 년 후면 청년들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교회에 청년은 없고, 과거의 영광을 누렸던 기성세대만이 교회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청년 사역자들이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지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청년들이 변화되지 않고 모이지 않는다. 

 

엘리사 시대, 하나님이 노력하지 않으셨는가? 

아니다. 하나님도 열심히 당신의 일을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돌릴 수는 없으신 모양이다. 

그분이 할 수 없는 것 한 가지는 사랑을 주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사랑하게 만드는 일이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기로 하셨다. 

그분의 성품이 그런 강제성을 수용하지 않는다. 

사랑의 원천이신 그분은 강제적 사랑을 원치 않으신다. 

충분한 사랑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었음에도 심지어 죽음의 문턱에서 구출했음에도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들을 어찌 할 수 없는 분이시다. 

다윗 같은 사람이 정말 별로 없다. 

모세 같은 사람이 정말 별로 없다.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여호아스는 시리아로부터 고통을 받았다. 

계속 침략하는 그들을 대적할 힘이 그에게 별로 없었다. 

한동안 하나님을 떠났었지만, 전쟁을 앞두고, 또한 엘리사의 죽음을 앞두고, 엘리사에게 달려갔다. 

그의 도움 없이 전쟁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시여!”

엘리사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애절하다. 

아쉬움도 남는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아버지요, 이스라엘의 진정한 병거와 마병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왜 그 사실을 여호아스는 알지 못했는가! 

영광을 사람에게 돌릴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했다. 

엘리사도 이정도의 칭찬이라면 정색을 해야 했다. 

죽음을 앞두고 눈치 볼 것도 없으니, 담대하게 말해도 되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병거와 마병이라고 강하게 외쳐도 될 일이었다. 

 

화살을 날리고, 땅을 치라는 요청도 어찌보면 참 어이 없다. 

여호아스의 믿음을 확인할 다른 방법도 있었다. 

이참에 그동안 저질렀던 죄악에 대해 회개를 요청할 수도 있었다. 

사무엘 시절의 미스바 대각성 집회 같은 것을 요청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왕부터 백성까지 모두 하나님께 회개하는 조건으로 승리를 약속했으면 좀더 낫지 않았을까!

역사의 가정은 없다지만, 아쉬운 대목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제 곧 3월이다. 

새로운 변화가 가장 많은 시절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나는 시기기도 하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대학생, 청년이 많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이 더 많아지길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여호아스건 엘리사건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아무리 큰 능력을 행하더라도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게 하소서. 

 

큰 성취를 이루었다고 교만치 않게 하소서. 

성취가 없다고 좌절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일하심을 겸허히 기다리기 원합니다. 

그 일을 보는 것은 특혜요 은혜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보지 못하더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제 눈에 안보이는 것이지, 전 세계 곳곳에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내일 있을 마라톤 대회도 주님을 생각하며 달리게 하소서. 

달리는 내내 주님께서 일하시길 기도하며 달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2월 28일 수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10 유다의 요아스 왕 제 삼십칠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여호아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열여섯 해 동안 다스렸다.11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로부터 돌아서지 않고, 그 길을 그대로 걸었다.12 여호아스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모든 일, 또 그가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용맹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13 여호아스가 죽으니,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안장하였고, 여로보암이 그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올랐다.

 

주석

12절. 유다 아마샤와의 전쟁(14장에 상술되어 있음)은 설명되고 있지만, 시리아를 물리친 그의 더 중요한 승리(25절)는 나오지 않는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여호아하스의 아들 여호아스가 왕이 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그도 16년이나 북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심플하다. 

그는 하나님 보기기에 악을 행했는데, 그 악의 핵심은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여로보암의 죄를 따랐다. 

여로보암의 죄가 왜 그리 무서운가?

그것은 그가 자기 혼자만 우상을 숭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북이스라엘 전역에 혼합주의 신앙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단과 베델에 송아지 우상을 세웠다. 

그리고 제사장을 자신이 직접 임명했다. 

자신이 하나님 자리를 대체했다. 

그러자 백성들도 출애굽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송아지 우상을 섬기게 된 것이다. 

혼합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이것이 문제였다. 

여로보암 혼자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도록 강제한 것이었다. 

그 땅에 태어난 어린 아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송아지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에 절대로 조각상을 세워 섬기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과 권력을 위해 사람들을 조종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절대 그 길을 따라서는 안된다. 

 

그런데 여호아스가 그 길을 다시 따르고 있다. 

자신이 타락한 것을 넘어 다른 사람들도 타락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이 그런 자들이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끈다. 

그러면 문제가 커진다. 

이런 죄악은 구조화가 되기 마련이다. 

한 개인으로 끝나지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죄악으로 이끌었던 그 경험이 구조적으로 사회와 공동체에 삽입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그 다음 세대도 죄악의 길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다윗의 죄와 여로보암의 죄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다윗도 하나님 보기시에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눈물을 흘렸다. 

핵심은 “하나님 앞에”에 있다. 

그의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속된 말로 지지고 볶았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구조를 공동체에 심었다.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여호아스도 그 죄의 길을 걷고 있다. 

그 구조화된 시스템이 그도 망가뜨리고 그의 백성들도 망가뜨린다. 

할아버지 예후의 종교개혁은 이제 허망한 역사가 되고 말았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 정기적으로 쇄신되고 혁신되어야 한다. 

개혁되어서 새로워져야 한다. 

약속을 다시 상기하고, 하나님이 처음에 주신 그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몸과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기를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 

구조화된 죄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소서. 

그 죄악의 시스템이 사람들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철저히 목도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구조화된 죄를 끝까지 반대하고 싫어하도록 이끄소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제 안의 죄악을 보게 하소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원심력을 인지하게 하소서. 

열망의 드라이브가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원심력이 강하게 작동합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붙들게 도우소서. 

 

청년들의 삶에 하나님이라는 구심점이 크게 자리잡길 기도합니다. 

주님께 닻을 내리게 하소서. 

다른 것으로 중심을 삼지 않도록 이끄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2월 27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 유다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 왕 제 이십삼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열일곱 해 동안 다스렸다.2 그러나 그는 주님 보시기에 악한 행동을 하였고,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 그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다.3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시리아의 하사엘 왕의 손에 그들을 넘기시고, 계속해서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다.4 그러나 여호아하스가 주님께 간절히 용서를 구하니, 주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이스라엘이 시리아 왕의 억압으로 고난을 받고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다.5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 구원자를 보내어, 시리아의 손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셨고, 이스라엘 자손은 예전처럼 그들의 장막에서 편안하게 살았다.

6 그럼에도 이스라엘 자손은,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여로보암 가문의 죄로부터 돌아서지 않고, 여전히 그 길을 그대로 걸으며, 사마리아에는 아세라 목상까지도 그냥 세워 두었다.7 시리아 왕이 여호아하스의 군대를 공격하여 타작 마당의 먼지같이 만들었기 때문에, 여호아하스에게는 겨우 기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병 만 명만이 남았다.8 여호아하스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모든 일과, 그가 누린 권세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9 여호아하스가 죽으니, 사마리아에 안장하였고, 그의 아들 여호아스가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메시지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고치지 않았고, 이제는 이스라엘의 특징이 되어 버린 여로보암의 죄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사마리아에 여전히 성행하고 있던 아세라의 음란한 종교 산당이 그중 하나였다(6절).

 

주석

아세라 목상(6절). 아세라는 엘의 배우자로서 대중에게 인기 있는 여신이었다. 성경 기사에 아세라가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것은 아세라 숭배가 야웨 예배의 주요 경쟁 상대였음을 나타낸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왕조가 바뀌고, 새로운 왕이 등장했지만, 그도 여전히 죄를 짓고 만다. 

예후는 종교 개혁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말년에 실수한 부분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 

예후의 끝이 좋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건 참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의 끝이 아쉬웠던 탓일까.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는 예후의 개혁 정신을 본받지 않고, 과거의 여로보암의 길로 빠지고 만다. 

하나님 대신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겼던 것이다. 

참 인간은 알다가도 모를 존재다. 

역사가 말하고 있건만, 어찌 그렇게 쉽게 죄의 길로 간단 말인가? 

좀더 강력한 구조적 울타리가 있어야 했을까! 

죄의 길을 가지 않게 하기 위해 더 다양한 방식의 안전장치를 마련했어야 했다. 

그 중 하나가 신상과 신당들을 모조리 없애는 것도 해당된다. 

혹은 정기적으로 왕이 신앙 집회를 열거나, 율법에서 명한 바 여러 절기와 규칙들을 잘 지켰어야 했다. 

여호아하스의 죄로 인해 북이스라엘은 또 다시 곤경에 처한다.

시리아의 하사엘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또 이 순간에 여호아하스는 하나님을 찾는다. 

위험의 순간에는 하나님을 찾는다. 

위험이 지나가면 또 다시 죄를 짓는다. 

인간이 이렇다. 

인간 심리 속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있나보다. 

기존의 것은 지루하고 식상해한다. 

결국 하나님도 지루하고 식상해하는 것이 인간이다. 

처음 마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약속에 신실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다.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다. 

그 열망을 이기기가 쉽지 않다. 

인류 역사는 새로운 것의 도전의 역사다. 

지키는 것은 지루해보일 뿐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자신이 돋보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시리아의 위협이 끝나자, 곧바로 죄의 길로 들어갔다. 

특히 아세라 목상을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여전히 그냥 세워두었다. 

또 다시 시리아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그리고 여호아하스에게는 아주 소수의 군대만 남게 되었다. 

17년의 통치 후에 남은 군대는 한 나라를 관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역사의 주인은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계획을 실천해야 하는 소명을 받은 왕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역사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을 이끌고 나가야 하시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이라도 사용해야 한다. 

때로는 꾸짖기도 하시고, 때로는 혼을 내시기도 한다. 

그분의 백성이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을 떠나서는 소명자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소명을 받은 사람은 최선을 다해 그분의 뜻을 추구해야 한다. 

 

나의 자의식도 소명자이다.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하기에 최선을 다해 그분의 뜻을 추구한다. 

비록 완전하지도 균형잡히지도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그 소명을 향해 나아간다. 

오늘도 그분의 뜻에 집중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 

소명을 받은 사람의 삶은 어찌보면 단순합니다.

소명을 주신 분의 눈과 손만 집중하면 됩니다. 

주님이 제게 주신 소명을 끝까지 붙들게 하소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힘들 때나 쉬울 때나 변함 없이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이스라엘의 왕들의 변덕이 참 아쉽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당신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 약속을 저도 끝까지 지켜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삶의 끝자락에,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고 신뢰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2월 23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 예후 제 칠년에 요아스가 왕이 되어, 마흔 해 동안을 예루살렘에서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시비아는 브엘세바 사람이었다.2 요아스는 여호야다 제사장이 가르쳐 준 대로 하였으므로, 일생 동안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3 다만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향을 피웠다.

 

4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말하였다. “주님의 성전에 들어오는 모든 헌금, 곧 일반 헌금과 의무적으로 부과된 헌금과 자원하여 주님의 성전에 가져 오는 헌금을 모두,5 제사장들이 각 담당 회계로부터 받아서, 성전에 수리할 곳이 발견되는 대로 그 수리할 곳을 모두 고치도록 하십시오.”6 그러나 요아스가 왕이 된 지 스물세 해가 지나도록, 제사장들은 그 성전의 수리할 곳을 고치지 않았다.7 요아스 왕이 여호야다 제사장과 다른 제사장들을 모두 불러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아직 성전의 수리할 곳을 고치지 않고 있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담당 회계로부터 돈을 받아 두지 말고, 성전을 수리하는 데 쓰도록 직접 넘기게 하십시오.”8 제사장들은 이 일에 동의하여, 제사장들이 백성으로부터 돈을 받거나 성전을 직접 수리하거나 하는 일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NIV 

Joash said to the priests, “Collect all the money that is brought as sacred offerings to the temple of the LORD -the money collected in the census, the money received from personal vows and the money brought voluntarily to the temple(4절).

 

주석

4절. 왜 성전을 수리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여기에 제시되어 있지 않다. 대하 24:7에 따르면 아달랴의 아들들이 성전 경내의 일부를 파괴하고 그것들을 바알 숭배에 바쳤기 때문이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요아스 왕은 일곱 살에 왕이 되어 40년을 통치한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왕으로서 역할을 감당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 모두 40년씩 통치했다. 

40년 통치만으로도 참 위대한 일을 한 것이다. 

그 기간에 쿠테타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였다. 

그의 일생 전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발랐다. 

이런 평가를 듣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숱한 위기가 왜 없었을까? 

통치를 하다보면 다양한 위기에 봉착했을 것이다. 

어떻게 그 위기를 넘겼는지 성경은 자세하게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여호와 신앙의 열정으로 가득했던 여호야다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랐던 어린 왕은 성년이 되어서도 그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어느날 요아스는 제사장들에게 성전을 수리할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다. 

요아스가 보기에도 성전에 부족한 것들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은 이제 많이 낡았다. 

게다가 아달랴의 아들들이 성전의 일부를 파괴하고 그것을 바알 숭배에 사용하기까지 했었다(IVP 성경주석). 

제사장들이 각 회계로부터 헌금을 전달받아 성전 수리 할 것을 명령했다. 

그만큼 요아스의 성전 사랑은 남달랐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그의 마음도 상당했다. 

그 마음이 바알 신앙의 뿌리까지 뽑았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지만, 전국 곳곳에 설치된 바알 신당 전체를 다 제거하지는 못했다(3절). 

이점이 가장 아쉬운 점이다. 

노력을 안 하지는 않았겠지만, 백성들의 일상 속에 깊이 뿌리 박힌 우상 숭배를 막기란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민간 신앙을 중앙 정부가 통제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이해는 하면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완벽은 하나님 나라가 다시 오시지 않는 한 도달하기 어렵다. 

종종 완벽주의자들이 공동체의 이상을 거론하며 도달하기 힘든 지점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들의 이상에 공감하면서도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모습에는 반대할 수 밖에 없다. 

현실은 무던한 노력과 에너지와 자원과 관리가 필요한 법이다. 

한 두 번의 조치로 목표한 완벽한 이상에 도달할 리 만무하다. 

말은 쉽지만, 그 내용을 오랫동안 지속하는 것은 또 다른 난관이다. 

요하스를 이해하는 측면에는 이런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23년이 지나도록 제사장들이 제대로 성전을 수리하지 못했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왕이 분명히 명령을 내렸고, 재정도 확보했을 텐데, 왜 제사장들은 그 일을 수행하지 못했을까? 

여러 가지 원인을 추측해 볼 수 있다. 

1) 재정이 충분치 않다. 

2) 건축 기술자들이 없다. 

3) 제사장들이 수리 업무에 큰 관심이 없었다. 

4) 제사장들이 수리 관련 전문성이 없다. 

5) 기타 등등

잘 모르겠다. 다만, 내 상황에 비추어 내가 선호하는 추측은 4)번이다. 

제사장들은 제사 드리는 데에 전문성이 있다. 

다른 영역에는 그다지 뛰어난 능력이 없다. 

그러니 관심이 떨어지고, 실천 능력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요아스는 이 상황에 화를 낼 수도 있었다. 

23년이나 지체된 일이었다. 

성전은 그 사이에 더욱 낙후되었다. 

그러나 요아스는 화를 내지 않았다. 

도리어 새로운 제안을 했다. 

돈을 관리하고 운영하는데 전문성이 부족한 제사장들이 그 일을 맡기보다, 돈을 잘 관리하고 실제 건축을 할 수 있는 전문가를 고용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제사장들의 동의를 구한 뒤에 그 일을 진행했다. 

요아스는 현명한 왕이었다. 

혼자 결정해서 진행하지 않고, 동의를 구한 뒤에 진행했다. 

 

동역자들의 동의가 중요하다. 

함께 이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중요하다. 

혼자 독불장군식으로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의견을 구하고 동의를 구하고 함께 진행해 나가야 한다. 

 

솔직히 힘이 많이 빠져 있다. 

일을 추진하다보면 갈등이 생긴다. 

그 갈등을 마주할 힘이 많이 빠진 것 같다. 

그냥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다. 

일이 아니라 서로 성장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오늘의 기도]

40년의 요아스 통치를 살펴봅니다. 

40년간 좋은 통치를 펼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주님 앞에서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인생 전체를 평가할 때, 주님께서 ‘참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끝까지 잘 감당하게 도와주세요. 

어려움이 있을 때,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하소서. 

영혼을 돌보고,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분노하지 않으며, 사랑으로 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