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2월 08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25 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아들 요람 제 십이년에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유다 왕이 되었다.26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고, 그는 한 해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아달랴는 이스라엘 오므리 왕의 딸이었다.

27 그는 아합 가문의 사위였으므로, 아합 가문의 길을 걸었으며, 아합 가문처럼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28 그는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시리아 왕 하사엘과 싸우려고 길르앗의 라못으로 갔다. 그 싸움에서 시리아 군대가 요람을 쳐서, 부상을 입혔다.29 요람 왕이 시리아 왕 하사엘과 싸우다가, 라마에서 시리아 사람들에게 입은 상처를 치료하려고 이스르엘로 돌아갔다. 그 때에 아합의 아들 요람이 병이 들었으므로, 여호람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시야 왕이, 문병을 하려고 이스르엘로 내려갔다.

 

NIV 

Ahaziah was twenty-two years old when he became king, and he reigned in Jerusalem one year. His mother's name was Athaliah, a granddaughter of Omri king of Israel(25절).

 

[오늘의 묵상]

** 아합 가문의 사위

열왕기하의 저자는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하시야 왕이 아합 가문의 사위였기 때문이란다. 

이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책임 전가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현재 한국의 상황으로 스물두 살은 사실 어린 나이에 속한다. 

사회생활을 잘 모르고 이제 막 배우는 나이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스물둘은 그렇게 어린 나이가 아니다. 

왕자로서, 차기 왕으로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것이며, 충분히 사리분별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럼에도 단순히 아합 가문의 사위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악행을 합리화하는 것은 아쉽다. 

 

허나, 어머니가 오므리 왕(아합 왕)의 딸 아달랴라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아달랴는, 후에 보겠지만, 그의 어머니 이세벨을 닮아 난폭하고 잔인하다.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아하시야는 나이가 들어도 독립적인 자기 주관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통치는 일년에 불과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다윗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하고, 도리어 오므리 왕조의 아합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이세벨은 이방민족의 여인)의 영향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기준을 바로 세우지 못하면 결국 상황과 환경에 휘둘린다. 

악이 선을 내쫓는다. 

이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했어야 했는데, 유다의 여호람 왕이 결정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정치적 판단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근본을 지키는 판단이다. 

여호와 신앙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대통령이 무속인의 도움을 받으면 안된다. 

귀신들이 성공을 보장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자신과 공동체를 망가뜨린다. 

여호와 신앙으로 무장한 리더가 등장하길 바란다. 

그러나 단순히 주여 주여 부르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길 원치 않는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삶의 원리로 삼은 사람이 지도자가 되길 바란다. 

마태복음 5-6장의 산상설교의 내용을 정치 원리로 풀어내길 원하는 사람이 리더, 대통령이 되면 제일 좋겠다. 

사탄과 귀신이 좋아하는 방식을 사용하면 그 순간에는 승리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모두를 죄악으로 이끈다. 

 

 

[오늘의 기도]

인류의 역사를 보시면서 항상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 

과거 유다의 상황을 보시면서도 참으로 고통스러우셨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유다 왕이 점점 아합 왕가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괴로우셨을지 상상해 봅니다. 

 

주님, 

지금 이 땅에도 주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 가운데 계십니다. 

수많은 청년들이 주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는 그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쉴드를 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청년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더 강력하게, 더 설득력있게, 더 매력적으로 심어 주소서. 

그들 마음 속에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커지도록 인도해주세요. 

 

아하시야 왕이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가 비록 아합 왕가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의 중심을 잡고 하나님 섬기기로 결단했으면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 상황을 핑계 삼아 하나님 섬기는 것을 포기하거나 회피하는 일이 없도록 주님께서 이끌어 주소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서 오직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기를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일어나도록 이끌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2월 07일 수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16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 오년에 여호사밧이 아직도 유다의 왕일 때에,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다스리기 시작하였다.17 그는 서른두 살에 왕이 되어, 여덟 해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렸다.18 그는 아합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아합 가문이 한 대로, 이스라엘 왕들이 간 길을 갔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19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의 종 다윗을 생각하셔서 유다를 멸망시키려고는 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이미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서 왕조의 등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20 여호람이 다스린 시대에, 에돔이 유다의 통치에 반기를 들고 자기들의 왕을 따로 세웠다.21 그래서 여호람은 모든 병거를 출동시켜 사일로 건너갔다가, 그만 에돔 군대에게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호람은 병거대장들과 함께, 밤에 에돔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 나왔다. 군인들은 모두 흩어져 각자의 집으로 갔다.22 이와 같이 에돔은 유다에 반역하여 그 지배를 벗어나 오늘날까지 이르렀고, 그 때에 립나 역시 반역을 일으켰다.23 여호람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24 여호람이 죽어, 그의 조상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었다.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주석

립나(22절). 블레셋과 유다의 국경 부근에 이었던 것으로 보아 블레셋의 도시로 추정한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아합의 딸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동족이다. 

서로 반목했을 때도 있었지만, 협력할 때도 있었다.

지난 번 모압을 치러 올라갈 때도 유다와 이스라엘은 합공을 펼쳤다. 

이번에는 유다의 새로운 왕 여호람이 아합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혼인을 통해 남북 왕조의 결속을 다진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북이스라엘의 죄악이 극에 달했을 때,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아합의 부인인 이세벨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아합의 딸을 유다의 왕비로 맞이하고 있다. 

왜 하필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을까!! 

아합 가문이 행한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북이스라엘에게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엘리야와 엘리사가 예언했던 그 많은 내용을 남유다 왕실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이방신 바알을 왕실에 들여와 북이스라엘을 온통 혼합주의 신앙으로 바꾸었던 이세벨의 영향을 우려하는 신하가 전혀 없었단 말인가? 

이러니 유다 땅에도 바알 신앙이 유입되고 만다. 

유다 왕 여호람은 아합의 딸을 아내로 맞아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따라하게 된다. 

 

이 당시 결혼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실행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고려와 정략에 의해 맺어진다. 

아합의 딸을 통해 북이스라엘과 더 공고한 관계를 맺으려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겠다. 

그러나 정치를 생각하기 전에, 유다의 왕과 신하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구했어야 했다. 

유다는 일반적인 나라가 아니다. 

전 세계를 향한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방신을 들여왔던 아합 가문의 딸을 왕비를 맞이한 것이다. 

 

2. 약속

하나님은 유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보류하신다. 

그 이유에 대해 성경 저자는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약속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에 매여 계신다. 

약속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자기 제한의 결정이다. 

다윗의 왕가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통치자, 메시아가 나올 것을 약속하였다. 

다윗의 왕가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다윗의 자손을 통해 인류의 구원자를 내시겠다는 당신의 계획은 독백이 아니라 구체적인 약속과 확언으로 세상 밖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반역한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할 때도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했다. 

하나님은 당신이 공언한 약속에 대해 끝까지 지키시겠다는 의지가 있으시다. 

그분의 약속과 신실함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여전히 믿고 신뢰한다. 

약속은 선물이고, 약속은 은혜를 낳는다. 

약속에 기대어 우리는 대범한 제안을 할 수 있다. 

약속을 악용하지만 않으면 된다. 

부족함과 연약함에 대해서는 약속에 기대어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에 기반해서 설립되고 운영되고 유지된다. 

기업이나 국가의 운영 원리과 똑같을 수는 없다. 

유사한 원리도 있고, 적용가능한 방식도 있겠으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다. 

머릿돌 되신 예수님 위에 교회는 세워지고, 함께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 위에 교회는 건재하다. 

친목 모임이 아니다. 

스터디 카페도 아니다. 

그분의 약속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교회다. 

 

개인에게도 약속을 주실 수 있다. 

소명이 그렇다. 

한 개인을 불러 주시고 그 소명으로 끝까지 살아가도록 이끄신다. 

그 약속이 있기에 소명을 품는 자는 절망하지 않는다. 

약속을 믿고 정진한다. 

그 약속을 자주 상기하는 것이 영성에 큰 도움을 준다. 

 

[오늘의 기도]

약속을 주시고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 

예수님이 당신의 약속의 성취임을 믿습니다. 

그 약속을 자주 상기하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중요한 의사 결정에 있어서 경제적, 정치적 논리가 아니라, 약속에 기반한 논리로 이끌어 주소서. 

제게 주신 약속을 기억합니다. 

한 평생 주님만을 위해 살겠다는 저의 약속도 기억합니다. 

저의 약속은 흔들리지만, 주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일에 주님께서 주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 일에 사용하여 주소서. 

오늘도 만나는 사람, 기억나는 사람들을 회복 시키는 일에 사용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2월 06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7 엘리사가 다마스쿠스에 갔을 때에 시리아 왕 벤하닷은 병이 들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왕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이 곳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8 왕이 하사엘에게 말하였다. “예물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시오. 그리고 그에게, 내가 이 병에서 회복될 수 있겠는지를, 주님께 물어 보도록 부탁을 드려 주시오.”
9 하사엘은 다마스쿠스에서 제일 좋은 온갖 예물을 낙타 마흔 마리에 가득 싣고, 몸소 예를 갖추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서 말하였다. “예언자님의 아들 같은 시리아 왕 벤하닷이 나를 예언자님에게 보냈습니다. 왕은, 자신이 이 병에서 회복되겠는가를 여쭈어 보라고 하였습니다.”10 엘리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가서, 왕에게는 회복될 것이라고 말하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내게 계시해 주셨소.”
11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사람은, 하사엘이 부끄러워 민망할 정도로 얼굴을 쳐다 보다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12 그러자 하사엘이 “예언자님, 왜 우십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그대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어떤 악한 일을 할지를 알기 때문이오. 그대는 이스라엘 자손의 요새에 불을 지를 것이고, 젊은이들을 칼로 살해하며, 어린 아이들을 메어쳐 죽일 것이고,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가를 것이오.”13 하사엘이 물었다. “그러나 개보다 나을 것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주님께서, 그대가 시리아 왕이 될 것을 나에게 계시하여 주셨소.”
14 그는 엘리사를 떠나서 왕에게로 돌아갔다. 벤하닷 왕이 그에게 물었다. “엘리사가 그대에게 무엇이라고 말하였소?” 그가 대답하였다. “엘리사는, 왕께서 틀림없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15 그 다음날, 하사엘은 담요를 물에 적셔서 벤하닷의 얼굴을 덮어, 그를 죽였다.

주석
12절. 왕상 19:17-18을 보면 하사엘은 이스라엘로부터 바알 숭배를 제거하는 역할을 감당하도록 예견 받았다. 그러나 엘리사의 예언에서는 시리아의 압제가 강조되고 있다(IVP 성경주석).
13절. 왕상 19:15를 보면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하사엘을 시리아 왕으로 기름 부으라고 지시하셨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뻔뻔한 벤하닷 
시리아 왕도 참 뻔뻔하다. 
북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약탈하고 성읍을 공격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벤하닷 왕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다. 
엘리사가 유명해지긴 했나보다. 
엘리사 덕분에 하나님의 이름도 높아졌다. 
엘리사의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래서 시리아 왕도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했던 것이다. 
낙타 40마리에 각종 선물과 예물을 실었다. 
엄청난 양이다. 
목숨 앞에서는 적국의 예언자에게도 도움을 구한다. 
목숨 앞에서는 자존심도 버리고, 뻔뻔하게 구걸하게 된다. 

자신의 생명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되지만, 때로 그걸 넘어서는 결정과 결기를 보여 줄 필요도 있다. 
마태복음 10: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하고 계신다. 
일반적으로는 목숨이 최상의 가치다. 
그러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다. 
우주의 생명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통치는 영원하다. 
영원한 그분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도 있다. 
신앙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 

시리와 왕의 뻔뻔함과 억척스러움에 한 편으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충분히 누린 분이 적국의 예언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2. 피할 수 없는 슬픔
엘리사는 큰 슬픔에 빠진다. 
벤하닷 왕의 명령을 받아 찾아온 하사엘이 결국 시리아의 왕의 되어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서운 전쟁이 시작될 것이며, 하사엘은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은 하나님의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다. 
아합과 이세벨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심판이다. 
하나님과 바알을 섞어 버렸다. 
공의로운 하나님의 통치를 권력자 중심의 폭압 통치로 바꾸었다. 
왕과 왕비가 원하면 어떤 법도 고칠 수 있고, 어길 수 있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했다. 
종교와 사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서 너무 멀리 멀어졌다. 
하나님은 이들의 죄악을 심판하시기로 했고, 그래서 시리아의 하사엘을 왕으로 삼으시고 전쟁을 주도하게 하신다. 
이스라엘이라도 그들의 죄악을 그냥 방치하시지는 않는다.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 
엘리사는 그 미래를 보았기에 눈물을 흘렸다. 
그 미래는 과거 죄악의 결과이기에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과거라고 해서 현재 북이스라엘이 아합의 죄에서 벗어났는가? 
그렇지 않다. 여전히 그들은 여로보암과 죄와 아합의 죄를 따르고 있었다. 
철저한 회개와 회심이 없었다. 
그러니 그 심판의 예언이 계속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심판은 마지막으로 미뤄졌다. 
하나님이 지금 구약시대처럼 심판하시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사람들을 계속 초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초대에 응해 변화되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초대에 감사하면 된다. 
나의 선조의 죄와 내가 지은 죄로 인해 심판받을 것을 두려워해 숨을 필요가 없다. 
심판은 유예되었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하셨다. 
은혜와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보여준 사랑을 기반으로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속 초대하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과거에는 힘있고 위대하고 전쟁에 능하고 불의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우주 유일의 참 신 하나님으로 등장하셨다. 
그것이 복음이었다. 
연약하여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 놓여 있던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강력한 하나님이 복음이었다. 
지금도 연약한 사람들에게 강력하고 위대한 하나님이 복음이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은 그 위대한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엄청한 사랑이 죄를 짓는 수많은 사람들을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게 한다. 
당신이 하신 약속을 끝까지 지킬 힘은 그 위대한 사랑에 있다. 

엘리사는 죄악으로 멸망해가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울었다. 
우리는 여전히 참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사람들을 보며 울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진리를 말할 수 없다고들 한다. 
모두가 서로 자신의 경험과 주관이 옳다고 한다. 
객관적인 진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기에 우주적 유일신 하나님도 자신의 경험과 이성, 생각과 감정 아래 둔다. 
정말 그런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개인도 어쩔 수 없이 시대의 영향을 받는 내러티브의 산물이다. 
러프하게 보면 시대 사조에 따라 사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조차도 상대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진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주장도 상대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무시할 필요도 없다. 
단지 우리가 정말 봐야 하는 것은 ‘어떤 내러티브가 사람과 세상과 자연과 우주에 더 유익이 되고 지속가능하게 하고 풍요롭게 할 것인가’이다. 

피할 수 없는 슬픈 속에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을 떠올리며, 
주님의 긍휼을 구한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오늘도 주님의 슬픔을 느낍니다. 
피할 수 없는 슬픔을 공감합니다. 
참고 인내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끝까지 무시하고 공격하고 모독하는 자들에 대한 슬픔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그들의 삶이 새롭게 되게 하소서. 
당신의 은혜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게 하소서. 

피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소망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당신께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도하기 원합니다. 
더욱 아름다고, 선하고, 참된 것을 추구하는 자들이 많아지게 하소서.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주님의 뜻을 우선하는 자들이 더 많아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2월 03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 엘리사가 이전에 한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 준 일이 있었는데,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부인은 가족을 데리고 이 곳을 떠나서, 가족이 몸붙여 살 만한 곳으로 가서 지내시오. 주님께서 기근을 명하셨기 때문에, 이 땅에 일곱 해 동안 기근이 들 것이오.”2 그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이 한 그 말을 따라서, 온 가족과 함께 일곱 해 동안 블레셋 땅에 가서 몸붙여 살았다.

3 일곱 해가 다 지나자, 그 여인은 블레셋 땅에서 돌아와서, 자기의 옛 집과 밭을 돌려 달라고 호소하려고 왕에게로 갔다.4 마침 그 때에 왕은 하나님의 사람의 시종인 게하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왕이 게하시에게 엘리사가 한 큰 일들을 말해 달라고 하였다.5 그래서 게하시는 왕에게, 엘리사가 죽은 사람을 살려 준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에 엘리사가 아들을 살려 준 그 여인이 왕에게 와서, 자기의 집과 밭을 돌려 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게하시는 “높으신 임금님, 이 여인이 바로 그 여인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엘리사가 살려 준 바로 그 아들입니다” 하고 말하였다.6 왕이 그 여인에게 그것이 사실인지를 묻자, 그 여인은 사실대로 왕에게 말하였다. 왕은 신하 한 사람을 불러서, 이 여인의 일을 맡기며 명령을 내렸다. “이 여인의 재산을 모두 돌려 주고, 이 여인이 땅을 떠난 그 날부터 지금까지 그 밭에서 난 소출을 모두 돌려 주어라.”

 

[오늘의 묵상]

1. 수넴 여인의 순종

수넴 여인은 엘리사로부터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다. 

아들을 얻었고, 아들의 부활을 경험했다. 

그러니 엘리사의 말을 경청하고 순종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기근이 찾아온단다. 

수넴 여인의 가정은 가난한 집이 아니었다. 

가족들 뿐 아니라 식솔들을 거느리는 집안이었다. 

혼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블레셋 땅으로 가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 소중한 것들, 값이 나가는 것들을 가져가야 했다. 

블레셋 땅의 사람들에게 선물을 가져가야했다. 

익숙한 땅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이주를 해야 한다. 

무려 칠 년이다. 

칠 년간 고향 땅을 떠나 낯선 땅에 정착해야 했다. 

그리고 칠 년간 살던 그래서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역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것이 인생이다. 

떠나고 정착하고 다시 떠나고… 

떠나면서 대부분의 것은 남겨두고 소중한 것들 몇 가지만 가지고 간다. 

그 소중한 것들을 고르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소유의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내 인생에 버려도 무방한 것과 꼭 지켜내야 할 것, 그것들을 구분할 수 있을까. 

떠남과 정착의 반복 속에서도 꼭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족, 노트북, 돈, 여권… 

사랑, 신뢰, 믿음, 소망…

 

2. 게하시의 회복(?)

나병 환자가 되었던 게하시가 다시 등장한다. 

엘리사와 함께 있는 것 같지 않고 왕의 곁에 있는 듯 보인다. 

엘리사가 보여주었던 능력들을 간증하고 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 북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그 구원의 이야기를 왕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 구원의 이야기 중에 수넴 여인 아들의 부활은 빠질 수 없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이도 듣는 이도 흥분할 수 밖에 없다. 

믿기지 않는 일에 대해 서로 놀라하며 말하고 듣는다. 

그런데 그 수넴 여인이 왕궁에 도착했다. 

왕에게 접견을 청했다. 

왕 앞에 온 그 여인이 바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왕은 화들짝 놀라게 된다. 

이상한 점은 여인은 등장하는데, 남편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남편은 지난 번 아들 치료 과정에서도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었다. 

이 여인의 믿음과 리더십이 돋보인다. 

왕의 이야기의 주인공을 실물로 보면서 그의 소원을 들어준다. 

이 여인의 적극성과 리더십이 부럽다. 

때로 점점 소극적이 되어가는 내 모습이 부끄럽다. 

좀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이어야 하는데, 그래야 사람들을 더 많이 도울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내 모습에 안쓰럽다. 

 

게하시는 그래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쓰임받고 있다. 

비록 엘리사 눈 밖에 나서 저주를 받았지만, 그래도 그의 기억과 말로 인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이것도 인생이다. 

실수도 있고, 그래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지만, 다시 기회도 있고, 주님께 영광이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의 회복을 도울 수 있다. 

너무 완벽주의 입장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용하실지는 아무도 모른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과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다르다. 

한 두 가지 사건으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매도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를 통해 일하실지는 섭리의 영역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상황과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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