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1월 05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9 요단 강 맞은쪽에 이르러,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10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참으로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네 소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11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들 두 사람을 갈라 놓더니, 엘리야만 회오리바람에 싣고 하늘로 올라갔다.

 

12 엘리사가 이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엘리사는 슬픔에 겨워서, 자기의 겉옷을 힘껏 잡아당겨 두 조각으로 찢었다.13 그리고는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겉옷을 들고 돌아와, 요단 강 가에 서서,14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그 겉옷으로 강물을 치면서 “엘리야의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외치고, 또 물을 치니, 강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엘리사가 그리로 강을 건넜다.

 

15 그 때에 여리고에서부터 따라 온 예언자 수련생들이 강 건너에서 이 광경을 보고는 “엘리야의 능력이 엘리사 위에 내렸다” 하고 말하면서, 엘리사를 맞으러 나와,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16 그리고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여기에 선생님의 제자들이 쉰 명이나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힘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을 보내셔서, 선생님의 스승을 찾아보도록 하십시오. 주님의 영이 그를 들어다가, 산 위에나 계곡에 내던졌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보낼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17 그러다가 그들이 하도 성가시게 간청하자, 엘리사는 사람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아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 쉰 명을 보내어 사흘 동안이나 찾아보았으나, 엘리야를 발견하지 못하고,18 여리고에 머물고 있는 엘리사에게로 돌아왔다. 엘리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희들에게 가지 말라고 하지 않더냐?”

 

NASB 

He took the mantle of Elijah that fell from him and struck the waters and said, “Where is the LORD, the God of Elijah?” And when he also had struck the waters, they were divided here and there; and Elisha crossed over(14절).

 

주석

갑절(9절). 통상 가족을 위해 충성을 다할 장자는 이만큼의 상속권을 가진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수석 후계자의 지위를 받겠다고 요청하는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겉옷(13절). 엘리야의 겉옷은 엘리사가 물려받은 그의 영과 힘을 나타낸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엘리사가 처음부터 ‘능력을 받기 위해' 따라갔는지는 미지수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나선다. 

급기야는 요단강을 건너는 스승의 뒤를 따른다. 

모세를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 같다. 

그전에도 스승 엘리야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듣고 보고 알아왔다. 

그러나 이생의 마지막 날, 엘리야는 겉옷을 들어 요단강을 쳤고, 요단강은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양편으로 물러났다.

스승을 따라 강 중심을 걷는다. 

그리고 어느새 요단강은 다시 합쳐졌다. 

 

엘리야는 자신을 끝까지 따라온 수제자 엘리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다. 

로맨틱한 감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마도 ‘저를 떠나지 말아 주세요’ 라든가, ‘스승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저도 데려가 주세요’라고 했을 터였다. 

혹은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참으로 현실적이었다. 

그는 엘리야의 능력의 두 배를 원했다. 

그 시대는 능력이 필요한 시대였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솔선해서 우상을 숭배한다. 

엘리야는 어쩔 수 없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였다. 

그렇다면 엘리사는 얼마나 많은 적과 싸워야 했을까!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엘리사는 능력을 구했다. 

말과 같이 달려도 지치지 않는 능력. 

비를 달라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 능력. 

우상의 제사장 혹은 선지자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능력. 

사탄과 그의 졸개들이 파놓은 함정을 피하고 그들의 권세를 꺾는 능력. 

능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현실적이게도 그리고 솔직하게도 능력을 구했다. 

 

이 시대에도 능력이 필요하다. 

우상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 

과도한 욕심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 

사탄의 술책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무엇보다 용서할 수 있는 능력. 

능력이 필요하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스승이 떠났다.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슬픔의 표현으로 자신의 겉옷을 찢는다. 

얼마동안 그는 자신의 슬픔을 표현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엘리야가 말한대로, 주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는 것을 보면, 두 배의 능력이 생길 것인지 시험할 때가 되었다. 

엘리야의 겉옷을 가지고 요단강으로 다시 걸어 들어간다. 

“엘리야의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엘리사가 주님에 대해 불신하는 마음을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묻고 있는 것이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과연 나의 하나님도 되시는지 묻는 것이다. 

아버지 같은 스승의 주 하나님이 자신에게도 주 하나님이 되시는지 묻고 있다. 

그의 외침은 그간의 오랜 갈망의 표출이었다. 

엘리야만으로는 그 시대의 악을 대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을 비롯한 선지자 학교의 수련생들 모두 엘리야의 두 배 이상의 능력을 받아야 했다. 

그래야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과 싸울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단강을 내리칠 때, 그렇게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이 능력이었다. 

승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던 제자들이 원했던 것은 바로 이 능력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위에서 내려오는 성령님을 받고 그 능력을 누리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제자들은 기도 중에 성령님을 받게 된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과 기적들을 행하고 다닌다. 

예수님 혼자 하시던 일들을 120명, 아니 그 이상의 제자들이 전 세계를 다니며 행한다. 

이 능력이 필요했다. 

 

엘리야는 하늘로 올려졌다.

그의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 

수련생들은 엘리야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내려 했지만, 엘리사는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늘로 올려졌다. 

예수님이 죽은지 3일 후에 제자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리고 하늘로 올리셨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부활도 승천도 믿지 못하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부활도 승천도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재림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도 사실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가 있을 뿐이다. 

아무리 말해도 스스로 경험하지 못하고는 믿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여리고의 예언자 수련생 같이 말이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 도마와 같이 말이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 그것이 복되다 하신다. 

그런 믿음이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생기길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주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유혹과 죄악과 구조악을 이길 능력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드러낼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령님께서 더욱 강하게 역사하여 주소서. 

생각은 더욱 명료해지고, 정서는 평안해지고, 영혼은 맑아져서

특별한 분별력을 갖추게 하소서. 

무엇보다 용서할 수 있는 능력,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소서. 

주님을 닮아가도록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1월 04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실 때가 되니, 엘리야가 엘리사를 데리고 길갈을 떠났다. 길을 가다가,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주님의 분부대로 베델로 가야 한다. 그러나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베델까지 내려갔다.3 베델에 살고 있는 예언자 수련생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물었다. “선생님의 스승을 주님께서 오늘 하늘로 데려가려고 하시는데, 선생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엘리사가 말하였다. “나도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하시오.”4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주님의 분부대로 여리고로 가야 한다. 그러나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여리고로 갔다.5 여리고에 살고 있는 예언자 수련생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물었다. “선생님의 스승을 주님께서 오늘 하늘로 데려가려고 하시는데, 선생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엘리사가 말하였다. “나도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하시오.”6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주님의 분부대로 요단 강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났다.7 예언자 수련생들 가운데서 쉰 명이 요단 강까지 그들을 따라갔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 강 가에 서니, 따르던 제자들도 멀찍이 멈추어 섰다.

8 그 때에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벗어 말아서, 그것으로 강물을 치니, 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두 사람은 물이 마른 강바닥을 밟으며, 요단 강을 건너갔다.

 

주석

1절. 이 이야기에 있는 여정은 벧엘로 우회하는 것을 제외하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된 장소들에 집중한다(IVP 성경주석).

3절. ‘예언자 수련생들’. 선지자직을 갖기 위해서는 훈련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이스라엘 역사의 이른 시기에 ‘선지자의 아들들/제자들’이라는 선지자 조합이 있었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엘리야는 정말 예수님을 닮았다. 

아니 예수님은 아마도 엘리야를 따라 하신 것 같다. 

북쪽 길갈에서 베델로, 여리고로, 그리고 요단강으로 긴 여정을 떠난다. 

엘리야를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자신이 혼자 그 길을 가야 한다고 할 때, 대부분의 제자들은 스승의 말에 순응했다. 

한 명 엘리사는 스승과 끝까지 함께 하길 원했다. 

엘리야가 가는 그길을 자신도 가고 싶어했다. 

만약 엘리야가 죽으면 자신도 죽으리라 생각했다. 

주님께서 데려가신다는 사실을 엘리야가 알았을 때, 그것이 회오리바람으로 하늘까지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혹 엘리야가 환상 중에 그것을 보았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해도, 제자들은 비유적인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즉 죽음이다. 

엘리야는 그의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을 하다가 이제 죽으러 가는 것이다. 

모세가 그러했듯이, 아론이 그러했듯이, 역사의 대업을 이루었던 사람들이 다들 가는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다. 

자신의 부르심, 사명을 완수하면 이제 그만 자리를 떠나면 된다. 

욕심부릴 일도 없다.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 다른 사명자를 통해 하실 일이다. 

사명을 마친 사람은 조용히 그분의 품에 쉬면 그만이다. 

노욕은 사람을 망친다. 

소명을 다했으면 조용히 후대를 축복하며 살면 그만이다. 

모든 것은 이제 자신의 손에서 떠났다. 

조용히 그동안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그런 역사들이 일어나기를 위해 기도하면 족하다. 

 

엘리야는 이제 마지막 여행을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여행을 통해 이 세상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셨다. 

엘리야는 마지막 여행을 통해 소명받은 사람의 끝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혼자 가야할 길이었건만, 엘리사는 끝까지 엘리야를 보필한다. 

 

베델에는 예언자 수련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연구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무당처럼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배우고,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자들이다. 

현실의 문제에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지 연구하고 실제 적용했다. 

누군가는 현실 정치에 쓴소리를 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북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선지서에 그대로 녹아있지 않은가! 

수련생들도 하나님이 엘리야를 하늘로 데리고 가실 거라고 알게 된다. 

 

특히 여리고의 수련생들은 엘리야를 따라 요단강까지 동행한다. 

하나님께서 건강해보이는 엘리야를 어떻게 데려가실지 궁금했을 것이다. 

회오리바람 이야기를 꺼냈지만, 진짜 그렇게 될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길갈, 베델, 여리고, 요단강 이 지역들은 이스라엘에게 상당히 의미있는 지역이다. 

길갈에서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행했다. 

베델은 도망자 야곱이 꿈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던 곳이다. 

여리고는 가나안 정복의 첫 성으로서, 군사적 무기를 동원하지 않았음에도 나팔 소리와 함께 무너졌었다. 

요단강은 홍해가 갈라졌듯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물에 닿자 강이 갈라졌던 그 강이다. 

하나 같이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짚고 있었다. 

베델의 예언자 수련생들이나 여리고의 수련생들이나 엘리야의 행보를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했을 것이다. 

그리고 요단강 앞에서 엘리야가 겉옷으로 물을 가르는 것을 보면서 아합시대, 아하시야 시대, 우상이 판을 치던 시대에도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수많은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 

최근에 본 요게벳의 노래와 <이집트 왕자> 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시 느끼게 만들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Amq9LH46Xg

짧은 영상이었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오는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깊이 경험할 필요가 있다. 

 

오늘 내용과는 크게 관련이 없지만, 필립 얀시의 글도 가슴에 남는다. 

“사고력이 아니라 회개와 용서의 능력이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한다.”(필립 얀시, 용서, IVP, p.102)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용서를 가르치셨다. 

분노와 복수의 사슬을 끊으셨다. 

복수가 아닌 용서가 이 세상을 지배하길 바래본다. 

평화의 첫 걸음은 용서이니까.

 

[오늘의 기도]

사명과 소명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으로 인해 지난 반세기를 살아왔습니다. 

꿈을 꾸었고, 비전을 보았고, 비전이 현실이 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여전히 저에게 사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사명을 향해, 그 소명을 향해 계속 걸어가게 하소서. 

 

후에 그 사명을 다하는 날, 손에 움켜쥐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주님 품에서 쉬고 싶습니다. 

노욕의 역겨움을 이겨내게 하시고, 여전히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인도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이 세상의 죄악을 직시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무엇보다 용서하지 않는 세태를 통탄히 여기며,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억울함을 증폭시키지 않되, 구조악과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소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용서의 물결이 흘러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1월 03일 수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9 그리하여 왕은 오십부장에게 부하 쉰 명을 딸려서 엘리야에게 보냈다. 그 오십부장은 엘리야가 산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소리쳤다. “어명이오. 하나님의 사람께서는 내려오시오!”10 엘리야가 그 오십부장에게 말하였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네 부하 쉰 명을 모두 태울 것이다.” 그러자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와 그의 부하 쉰 명을 태워 버렸다.11 왕이 다시 다른 오십부장에게 부하 쉰 명을 딸려서 엘리야에게 보냈다. 그 오십부장은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어명이오. 하나님의 사람께서는 내려오시오!”12 엘리야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네 부하 쉰 명을 모두 태울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와 그의 부하 쉰 명을 태웠다.

 

13 왕이 세 번째로 또 다른 오십부장에게 부하 쉰 명을 딸려서 보냈다. 그 세 번째 오십부장은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말하였다. “하나님의 사람께서는 우리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목숨과 어른의 종들인, 이 쉰 명의 목숨을 귀하게 여겨 주십시오.14 보십시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이미 오십부장 두 명과 그들의 부하 백 명을 모두 태워 죽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나의 목숨을 귀하게 여겨 주십시오.”

 

15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그와 함께 내려가거라. 그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리하여 엘리야가 일어나서, 그와 함께 왕에게 내려갔다.

16 엘리야가 왕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네 병에 관하여 물어 보려고 사절들을 보내다니, 이스라엘에 네가 말씀을 여쭈어 볼 하나님이 계시지 않더란 말이냐? 그러므로 너는, 네가 올라가 누운 그 병상에서 일어나 내려오지 못하고, 죽고 말 것이다’ 하셨습니다.”17 엘리야가 전한 주님의 말씀대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아하시야 왕이 죽었다. 그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동생 여호람이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때는 남왕국 유다에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즉위하여 다스린 지 이년이 되던 해였다.18 아하시야가 한 나머지 일들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

 

NASB 

When the third captain of fifty went up, he came and bowed down on his knees before Elijah, and begged him and said to him, “O man of God, please let my life and the lives of these fifty servants of yours be precious in your sight(13절).

 

[오늘의 묵상]

엘리야도 한 고집한다. 

그냥 오라고 해서 오는 사람이 아니다. 

그동안 무시 당했던 왕가의 사람들이 예를 갖추지 못할 때, 엘리야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한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 혹은 잡기 위해 50여명의 군사들이 동원되었다. 

오십부장은 왕의 명령을 엘리야에게 전달하기 위해 엘리야에게 명령한다. 

그러자 엘리야는 자기를 잡으러 온 군사들에게 불을 내려 몰살시킨다. 

이 사건이 아하시야 왕에게 들렸다. 

그런데 왕은 아랑곳 않고 다시 50명의 군사들을 보낸다. 

큰 부상을 당한 상태라 자신이 갈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군사와 함께 하나님의 제사장 혹은 예언자들을 대동했어야 했다. 

엘리야를 잡아 오려는 것이 아니라 정중히 모셔야 했다. 

그런 절차들이 무시되고, 그저 엘리야를 잡아 오기를 명령했던 아하시야의 책임이 크다. 

결국 두 번째 50명의 군사들도 하늘의 저주를 받아, 불에 타서 죽게 되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의 전투에서도, 물에 젖은 제물을 불사른 것도 엘리야였다. 

그 사건으로 850명의 이방 종교의 선지자들은 목숨을 잃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교만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아주 작은 존재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릴 자격을 주신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 반역이 결국 인간과 만물을 부패하게 만들었다. 

반역의 위치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래야 산다. 

반대로 살면 불의 심판이 기다린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다. 

 

두 번째 군사들도 몰살당했다. 

그럼에도 세 번째 군사들을 보내는 무모함은 어디서 배운 것일까? 

인해전술이다. 

세 번째 오십부장은 지혜로웠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목숨을 구걸한다. 

엘리야가 왕에게 오고 안오고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을 비롯한 자신의 부하 50명의 생사가 걸린 일이다. 

그는 겸손할 줄 알았다. 

50명의 군사들을 “엘리야의 종”(13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는 대적할 일이 아니라 겸손히 긍휼을 구할 일이다. 

 

지금 현실의 권력자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무당에게 묻지 말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해야 산다. 

지도자가 자신의 행보와 메시지를 무당이나 법사에게 묻는다면 그 지도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형식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기뻐하실 분이 아니시다. 

자기 표를 위해 정치적으로 교회를 이용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마음을 원하신다. 

마음 중심의 순종을 원하신다. 

무당에게 묻는 지도자, 무당에게 묻는 교인이 있다면, 속히 회개할 일이다. 

 

엘리야는 왕 앞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메시지 그대로 전달한다. 

왕은 곧 죽을 운명이다.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컫는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도자인 왕이 하나님 대신 다른 신에게 자신의 운명을 물어볼때, 그 왕은 이미 죽은 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망가뜨리고 있는 왕들에 대해 분노의 마음이 있으셨을 것이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엘리야는 왕에게 전달한다. 

가감이 없다. 

포악한 왕 아합과 그보다 더 악독한 왕비인 이세벨 앞에서도 담대했던 엘리야다. 

아하시야 앞이라고 해서 주눅들 필요가 없다. 

그저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할 뿐이다.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메세지가 있을 것이다.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그 중 하나가, 중독이지 않을까 싶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것에 중독되어 있다. 

도파민 중독이다. 

나도 피해가지 못한다. 

짧은 동영상에 대한 중독은 이제 거의 대부분의 현대인이 겪는 문제다. 

하나님은 도파민 중독과 싸우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 

 

1월 2일자 동아일보 사설을 읽었다. 

 

[사설]“일상의 사소한 중독도 위험… 고통 마주해야 행복해져”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40101/122858827/1

 

“그런데 우리 몸은 생리적 평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어 쾌락을 느끼는 만큼 균형을 잡는 과정에서 우울감이나 불안감 같은 고통을 겪게 된다.”

 

“렘키 교수는 ‘재미와 행복이 최고의 선이고 고통은 피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쾌락은 우리를 더 불행하게 만들 뿐’이라며 ‘인생의 고통을 마주하고, 경험하고, 고통과의 싸움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느낀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건 결핍이 아니라 우리가 빠져들고 갈망하는 것들이란 뜻일 게다.”

 

행복한 감정에 대한 갈망은 도리어 우울증을 낳고 고통을 가중시킨다. 

인간은 평형을 이루는 본능적 조절 작용이 있어서 술과 게임에 대한 중독은 우울증과 정신적 고통으로 상쇄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모순 덩어리 인간이다. 

자본주의 만큼이나 쾌락주의가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든다. 

인생의 고통이 사라진다고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통을 인내하라고 말씀하신다. 

고통과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한 과정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걸 너무 억지로 피하려고 하다 보면 도리어 중독에 빠지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 

하나님은 당장 심판하시지 않겠지만, 결국 모든 인간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고통을 회피하는 자여! 

더한 고통에 눈물을 흘릴 것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주님을 불신하는 자 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을 대적하는 자 되기 않게 하소서. 

모르는 것을 정직하게 물어보는 것과 하기 싫은 마음에 의도적으로 딴지를 거는 것은 다릅니다. 

저는 주님께 정직하게 묻고 싶습니다. 

대적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께 순종하고 싶습니다. 

가능한 모든 일상에서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잘 살피게 하소서. 

 

주님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주님, 저에게 주님의 메시지에 대한 확신을 더하소서. 

그리고 주님을 대적하는 모든 악과 구조에 대해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소서. 

무엇보다 주님이 가장 많이 들려주고 싶어하시는 복음의 이야기를 담대하게 말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1월 02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 아합이 죽은 뒤에, 모압이 이스라엘에게 반역하였다.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방 난간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 그래서 그는 사절단을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보내어, 자기의 병이 나을 수 있을지를 물어 보게 하였다.

 

3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디셉 사람 엘리야를 보고, 사마리아 왕의 사절단을 만나서 이렇게 전하라고 명령하였다.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다니,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4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네가, 올라가 누운 그 병상에서 일어나 내려오지 못하고, 죽고 말 것이다.” 엘리야는 천사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5 그리하여 사절들은 가던 길에서 돌이켜서, 왕에게 되돌아갔다. 왕이 그들에게 왜 그냥 돌아왔는지를 물었다.6 그들은 왕에게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길을 가다가 웬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우리를 보고, 우리를 보내신 임금님께 돌아가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으려 하다니,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 그러므로 너는, 네가 올라가 누운 그 병상에서 일어나 내려오지 못하고, 분명히 거기에서 죽고 말 것이다’ 하였습니다.”7 왕이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을 만나서 그러한 말을 한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더냐?”8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털이 많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는 분명히 디셉 사람 엘리야다” 하고 외쳤다.

 

주석2절. 저자는 에그론의 신의 이름을 본래의 바알세불(Baal-Zebul, 왕자 바알)에서 바알세붑(Baal­Zebub, 파리들의 주인)으로 바꿈으로써 그 신을 조롱한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포악한 왕 아합이 죽었다. 

하나님과 바알을 동시에 섬긴 왕으로 북이스라엘을 혼합주의 나라로 만들었다. 

종교적으로는 엉망이었지만, 경제/군사력으로는 주변 나라들에게 위협이었다. 

모압은 아합이 죽자마자 북이스라엘에게 굴복하던 태세를 전환했다. 

아하시야가 아합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자신의 왕국 다락방 난간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 

어느 나라건 작은 병을 고치는 의술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그정도로는 고치기 어려운 심각한 상해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도왔던 지난 시간들을 생각할 때, 아하시야 왕은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다. 

다윗이 그랬고, 솔로몬이 그랬다. 

자신들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그러나 아하시야 왕은 바알세붑(?)에게 문의한다. 

무당을 찾은 사울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하나님께 부복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왕이 해야 할 첫번째다. 

하나님은 왕들이 이렇게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기에 왕정을 반대하셨었다. 

왕의 이런 행동은 신하들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백성들도 왕을 따라 심각한 질병의 회복이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궁금함을 해소하기 하나님 대신 이방의 신을 찾을 것이다. 

왕은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를 드러내야 할 존재이나, 아하시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엘리야는 아하시야의 사절단을 꾸짖는다. 

그리고 아하시야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바알세붑을 의지했다는 사실로 인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신하들은 엘리야의 말을 듣고 다시 돌아가 아하시야 왕에게 들은 그대로 전달한다. 

사절단의 솔직한 전달은 왕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어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천사를 통해 엘리야에게 임했고, 그 메시지는 사절단을 통해 아하시야에게 전달된다. 

 

여기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 자체도 흥미롭지만,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전달되는지이다. 

하나님 - 천사 - 엘리야 - 사절단 - 아하시야. 

직접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메시지를 전달하신다. 

소위 말하는 직통계시보다는 여러 사람들의 입을 거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실 수 있다. 

이것은 지금도 비슷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붙잡은 경건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가 그 메시지를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그 누군가는 자신이 경험한 대로 그 메시지를 또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다. 

그렇게 나에게까지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신다.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을 통해 당신의 뜻에 대해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그 말씀을 공동체적으로 듣는 공동체는 참 복을 누리는 공동체다. 

 

IVF가 그렇게 되길, 송청이 그렇게 되길 소망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동체적으로 듣는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바쁘고 외롭고 정신없고 무기력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사랑의 연합이신 그분의 성품과 죄인을 구원하신 그 역사를 전달해야 한다. 

위로와 격려 그리고 용기와 사랑을 북돋우시는 그분의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때로 단호한 꾸지람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메시지를 듣고, 그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아하시야는 엘리야를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엘리야를 찾지 않았다. 

왜 그를 찾지 않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을 찾았는지 어처구니가 없다.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예언자를 찾지 않는 것이 아쉽기 그지 없다. 

그만큼 우상이 무섭다. 

우상의 말초적 영향력이 무서운 것이다. 

말초적 쾌락을 장려하고, 그림 이미지를 남겨 영혼을 잠식시켜 나간다. 

자유의지를 꺾는다. 

그것이 우상이 하는 일이다. 

그 우상 대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은 조금은 더 힘들고 에너지가 많이 들어간다. 

하나님은 그림 이미지나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역사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하셨던 일들을 그의 백성들이 기억해 냄으로써 세상에 드러나신다. 

어찌보면 엘리야나 엘리사가 그 일을 잘 못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타협하는 신앙인이 되고 싶지 않다. 

주변 사람들이 다 즐겁게 하니까 나도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인류사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지하고 싶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지금도 일하신다. 

역사하시는 그분과 함께 하는 하루가 되길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 1월 2일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날입니다. 

이날을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부담스런 날이기도 합니다. 

새해를 시작하고 새해의 업무를 처리해야 합니다. 

주어진 과제가 적지 않습니다. 

매일 주님께 맡기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일들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송청에는 소그룹 리더가 필요합니다. 

행복기숙사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공동체 속한 모든 형제자매들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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