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5월 01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25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26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27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28 도둑질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게 하십시오.

29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30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주석

30절. 옛 생활 방식을 따르면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고 말하는데(사 63:10), 이는 성령이 단순히 신적 은사나 힘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로 조금씩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부수적 증거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을 도우라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이 지켜야할 윤리와 도덕을 말하고 있다. 

정직함, 분노 절제, 근면함, 덕을 세우는 말, 친절함, 용서… 

좋은 도덕적 특성들을 말하고 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런 덕들을 키울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한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도둑질이 아니라,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최대의 목적은 개인의 자본 축적일 것이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최대한의 자유를 누린다. 

시간의 자유, 소비의 자유, 사람 활용의 자유를 누린다. 

그러다보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자신도 모르게 도둑질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돈이 돈을 낳는 세상, 기초 자본금이 있어야 다음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세상… 

그렇게 끝 모를 자본증식의 꿈을 꾼다. 

 

바울은 근면하게 일하는 것을 장려한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돈을 빼앗는 거라면 반대다. 

삭개오는 합법과 불법을 오가며 다른 사람들의 돈을 가져갔다. 

그가 회심하자 그의 돈가방이 회심하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 궁핍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었다. 

떳떳하게 벌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 미덕이다. 

 

바울은 영적인 일, 종교적인 일만 말하지 않는다. 

영의 구원만 다루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은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인색하지 않다. 

세상과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부자와 빈자로 나뉜다. 

매일 마주하는 것이 이 현실이다. 

 

2.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미덕은 성령님으로부터 나온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성품을 닯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분은 점진적으로 우리의 변화를 도모한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미덕은 성령님의 내적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 의지적 결단, 지속적인 훈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예수님을 닮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격이신 성령님께서 천천히 우리의 내면에 영향을 주고 존재를 빚어가신다. 

처음부터 모든 미덕을 소유할 수 없다.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예수님의 성품에 온전히 도달할 수는 없다. 

우리의 육체의 욕망이 완전히 죽지는 않기 때문이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구원과 삶에 절대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분이 슬프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거부 혹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의 뜻은, 서로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을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됨을 해치는 것이 바로 용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다. 

자신의 부족함도 인정하고, 상대방의 부족함도 용납하는 것, 이것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의 행태다. 

 

너무 슬픈 소식을 들었다. 

지인의 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달리면서 그를 위해 계속 기도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그를 위해 기도한다. 

주님의 기적을 바랄 뿐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 

당신을 슬프게 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의 뜻에 더 예민해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에 좀더 가까워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용납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에게 주님의 기적을 보여주시길 기도합니다. 

인간의 방법은 더는 작동하질 않습니다. 

어떤 약도 듣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 그의 육체에 일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4월 29일 월요일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1 주님, 악인에게서 나를 건져 주시고,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호하여 주십시오.

2 그들은 속으로 악을 계획하고, 날마다 전쟁을 준비하러 모입니다.

3 뱀처럼 날카롭게 혀를 벼린 그들은,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을 품고 있습니다. (셀라)

4 주님, 악인에게서 나를 지켜 주시고,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호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나를 밀어서 넘어뜨리려 합니다.

5 오만한 사람들이 나를 해치려고 몰래 덫과 올가미를 놓고, 길목에는 그물을 치고, 나를 빠뜨리려고 함정을 팠습니다. (셀라)

6 그러나 나는 주님께 아뢰기를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7 내 구원의 힘이신 주 하나님, 전쟁을 하는 날에 주님께서 내 머리에 투구를 씌워 보호해 주셨습니다.

 

NIV

Rescue me, O LORD, from evil men; protect me from men of violence(1절),

 

Keep me, O LORD, from the hands of the wicked; protect me from men of violence who plan to trip my feet(4절).

 

 

[오늘의 묵상]

1. 포악한 자

세상에는 포악한 자들이 있다. 

전쟁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 사람 죽이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자. 

폭력을 휘두르고 전쟁을 준비한다. 

이들이 정말 악독한 이유는, 단순히 폭력을 행사하기만 해서가 아니다. 

이들은 육체적 힘뿐만 아니라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다. 

전쟁을 계획하고, 전쟁을 도모하고, 전쟁을 획책한다. 

뱀의 혀를 가졌다. 

독사의 독을 품고 있다. 

그들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미움과 분노가 쌓이며, 전쟁의 명분이 늘어난다. 

이런 사람들이 악인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전쟁을 활용한다. 

사람들은 아둔하게도 전쟁을 획책하는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다. 

전쟁광에게 통치권이 넘어가면 세상이 시끄럽고 세상이 고통을 받는다. 

이들은 교묘하게 함정을 파고, 언론 플레이를 하며, 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한다. 

자신들이 먼저 침략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작은 충돌을 침소봉대하여 보도한다. 

군중들은 지도자의 궤략에 빠져 전쟁의 필요성을 강변한다. 

전쟁은 두려운 일이다. 

전쟁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다. 

포악한 자를 피해야 하며, 그들이 결코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깨어있는 합리적이고 선량한 시민들이 더욱 많이 필요하다. 

 

2. 애원

시인은 하나님께 애원하고 있다. 

포악한 자들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도 포악해지는 것이다. 

포악한 사람들보다 더 포악해지면 상대방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다른 하나는 지혜롭게 피하는 것이다. 

포악한 자와 폭력으로 맞서면 당하는 것은 당연히 자신이다. 

지혜롭게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데 시인은 다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바로 하나님께 애원하는 것이다. 

힘도 부족하고 지혜도 부족하다면 하나님께 애원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계속 붙들어야 한다. 

주님의 보호하심을 간구한다. 

주님께서 적들의 모든 궤계를 궤멸시켜주시길 기도한다. 

주님께 무릎을 꿇고 도우심을 바란다. 

악인들에게 둘러쌓여 있다고 느낀다면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한다. 

 

 

[오늘의 기도]

나의 보호자가 되시는 주님, 

이 세상은 악인들이 정말 많습니다. 

전쟁광들이 있습니다. 

전쟁하기를 즐겨합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그저 방치합니다. 

주님, 선량한 사람들, 약자들을 보호하소서.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살펴주소서. 

 

제 주변에는 악인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쟁 같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매일 돈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을 맞닥뜨리는 주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소서. 

주께 도움을 구하는 성도들을 구원하소서. 

청년들의 삶이 점점 힘들어집니다. 

그들에게 위로를 주시고, 새로운 소망을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4월 26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3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4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시기를 “그분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셔서, 포로를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합니다.

9 그런데 그분이 올라가셨다고 하는 것은 먼저 그분이 땅의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0 내려오셨던 그분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하늘의 가장 높은 데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주석

8-10절. 인용한 시편 68:18의 랍비들의 해석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었듯이, 선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 대한 언급으로 재해석된다. NRSV는 올라가시기 전에 먼저 내려오셨다고 말하는데[참고. “먼저(first)”를 삽입한 미심쩍은 사본 상의 변이], 하데스까지 내려갔다고 가정한다. 이 구절이 땅으로 내려오신 것, 명백히 성육신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NIV가 올바르다고 보인다. 최근의 많은 주석가들은 올라가신 후에 내려오셨다는 해석을 선호한다. 다시 말해, 교회에 대한 성령의 은사 수여를 통해 그리스도가 내려오신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 부르심에 합당한 삶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부르심을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기에 부르심은 다양한 직업군을 포함하여 다양한 봉사활동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그러한 개인적 부르심, 개인적 소명이 분명히 존재한다. 

바울은 이방인의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방인보다는 유대인에게 먼저 다가갔다. 

선교에 대한 명령과 부르심은 동일하나, 그것을 추진하고 진행하는 데에는 각자의 은사와 부르심에 맞게 흘러간다. 

칼뱅의 직업소명설에 의거해 개혁주의 신앙 전통에서는 직업 자체가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각자의 직업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기여한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좀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한다. 

각자의 직업을 소명으로 바라보기 전에,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은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하나됨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하나됨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성도들 간의 하나됨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의 모임은 서로 하나되어야 한다. 

 

이것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이다. 

이를 위해 온유함과 겸손함은 필수다. 

하나되기 위해서는 과격하거나 교만해서는 안된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해서도 안된다. 

복음의 본질이라는 측면을 고수할 때는 단호함과 용기가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외에는 언제나 온유하고 겸손하게 남을 나보다 더 높게 여기고 공동체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기독 공동체는 정치 결사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대리해서 수행하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다. 

하나님의 몸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니다.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고 헌신하는 존재들이다.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이 예수님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심으로써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셨다. 

따라서 그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 

원망과 불평과 판단과 정죄를 내려놓고 성령님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켜야 한다. 

 

어떻게 성령님은 성도들을 하나되게 할까? 

내가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령님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분,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예수님께 집중하도록 도우시는 분이시다. 

사람이 아니다. 목사가 아니다. 한 개인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께 주목하게 하고, 그분의 삶과 사역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떠오르게 하신다. 

성도들도 예수님으로 대동단결이 된다. 

자신의 능력이나 은사나 재능이나 쇼맨십이 아니라, 예수님이다. 

한 개인, 한 조직, 한 단체, 한 운동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2천년전부터 인류의 빛이 되신 예수님께 주목하는 것이다. 

예수님께 집중함으로 성령의 운행하심을 느끼고, 그 운행하심이 분열된 사람들을 한 몸과 마음으로 묶는다. 

그 하나됨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 성도들의 부르심이다. 

1차적 부르심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연합하는 것이요, 2차적 부르심은 성도의 하나됨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요, 3차적 부르심은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직업 활동 및 봉사 활동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것이다. 

순서도 중요하고, 그 중요도에 대한 강조도 중요하다. 

 

2. 충만케 하시는 분 

바울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기에, 성령님을 통한 하나됨을 이야기 하면서 결국 예수님께 집중하게 된다. 

 

10 내려오셨던 그분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하늘의 가장 높은 데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성령님도 하나님 아버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주권자로 계속 높이고 계신다. 

예수님은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올라가셨다는 말은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어디로 내려오셨는가? 

바로 하늘에서 땅으로 성육신한 몸으로 내려오셨다.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이루시다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다.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그분이 선물로 약속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그분이 올라가야 성령님이 온 지구에 충만하게 내려오실 것이었다. 

예수님의 영이 성도들을 통해 이 지구로 강력하게 내려오실 것이었다. 

이것이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요 선물이다. 

예수님 당신을 성령님을 통해 이 세상 곳곳으로 파송하셨다. 

왕이신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성도들 각 개인과 공동체마다 하나되게 하심과 충만케 하심을 실현시키셨다. 

그래서 하늘 가족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한 백성, 한 가족이 된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께 집중하는지 보게 된다. 

편지 곳곳에 예수님께 집중하려는 사도 바울의 모습이 보인다. 

그가 성령 충만한 이유다. 

모든 일상에서 예수님을 발견한다. 

예수님의 정신과 인격과 가르침을 발견한다.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신분과 정체성이 분명해지지만, 결국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성령님처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자아 확장의 세대, 개인주의의 세대, 자기 광고와 자기 표현의 시대에, 오직 예수님만 영광받으시도록 성도들을 이끌 수 있을까?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도울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은 정말 중요하고 심지어는 위대하기까지 하다. 

바울 신학을 칭의의 신학, 구원론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의 신학은 예수 중심의 하나됨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 같다. 

복음의 진리가 훼손되는 것도 못 참지만, 공동체가 분열되는 것도 참지 못하는 사람 같다. 

예수님이 지키신 성도들간의 연합을 깨뜨리는 것을 싫어한다.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지켜나가고자 하는 열정과 의지가 가득해 보인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하나가 되게 하는데 열심이다. 

가난한 자와 부자, 어린이와 어른, 남자와 여자, 종과 주인을 하나되게 하기 위해 열심을 품는다. 

그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대동단결되기를 갈망한다. 

 

나의 태도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기도]

성도들을 하나로 묶어 주시고 그 하나됨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됨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고 주목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하나될 수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 하나됨을 지킬 수 없습니다. 

성령님과 아버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듯, 오직 예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써 하나됨을 지킬 수 있습니다. 

주님, 우리 교회와 기독 공동체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되게 하소서. 

오직 예수님께 집중하도록 도우소서. 

 

예배와 찬송과 말씀이 예수님을 드러내게 하소서. 

그 하나됨을 지키고 유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4월 25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4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빕니다.

15 아버지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붙여 주신 분이십니다.

16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18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19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20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주석

15절. 15절은 기본적으로 모든 살아 있는 무리의 창조자시며, 그 각각에게 ‘형태’와 역할을 주권적으로 부여하시는 하나님을 천명하는 말이다. 히브리 전통에서는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이름을 주신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이름표를 붙여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의 본질을 결정한다는 말이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마음 속에 계신 예수님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 속에 거하신다. 

육신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계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예수님의 존재, 성품, 가르침, 비전 등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지속적으로 상기시키신다. 

내가 이해하기로 예수님이 마음 속에 있다는 말은, 삼위일체 중 한 위격이신 성령님이 영으로 사람의 마음에 거하신다는 의미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요, 예수님을 생각하게 하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 

성령님을 보고 있으면,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성령님의 일하심은 예수님의 현현이요 재현이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자연스레 예수님을 닮게 된다. 

이것이 마음 속에 계신 예수님의 실재다.

 

내 마음 속에 성령님이 계시는가?
그분이 더 활발히 일하시도록 그분께 요청하고 있는가? 

그분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2. 그리스도의 사랑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경험했던 사람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박해했던 바울을 만나주시고 인생의 새로운 목적과 목표를 제시해 주셨다. 

그 사랑이 그의 마음에 언제나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사랑이 더욱 크고 강력하고 엄청나게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령의 법에 대한 강조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 사랑은 온갖 지식을 초월한다. 

그 사랑은 성도들이 구원받게 되는 초석이며, 구원 이후의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 없고, 대리통치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사탄의 거짓과 술수와 계략과 위협과 유혹을 이길 힘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악행자들의 폭력과 억압과 위협 속에서도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수많은 재난과 고통 속에서도 대리통치자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어찌 어려움이 없겠는가? 

어찌 고통이 없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찌보면 더욱 피곤하고 고통스럽다. 

높은 윤리적 기준도 그렇고, 책임있는 대리통치자의 자리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이 잘 알아 주지 않은 것도 그렇고… 때로 더 외롭고 괴롭다. 

그분의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뚫고 나갈 힘이 없다. 

그분의 사랑 덕분에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개인과 교회와 공동체에 넘치게 흐른다. 

그분의 사랑 덕분에 공동체는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틀이 놓인다. 

그분의 사랑 덕분에 공동체가 하나님의 비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모든 지식과 정보와 이론과 사상보다 뛰어난 그분의 사랑 덕분에 이것이 가능하다. 

사람들 간의 사랑과 신뢰와 희생이 가능한 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 덕분이다. 

 

그 사랑을 나와 우리 공동체가 경험하길 소망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깊이 알고, 깨닫고, 삶으로 살아내길 소망한다. 

그분의 사랑이 더욱 드러나길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고 경험하고 느끼길 원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사랑, 내게 소명을 주시고 이끄시는 사랑, 오늘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용납하시고 용서하시는 사랑, 앞으로도 실수와 죄악과 부족함을 용납해주시는 그 사랑… 

그 사랑을 끝까지 신뢰하고 믿고 의지하며, 경험하고 정확히 인지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그 사랑을 흘려 보내는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 사랑을 후배들에게 청년들에게 학생들에게 흘려 보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를 보호하려기보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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