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5월 16일 목요일

 

여는 기도

주님,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겠습니다.

 

1  나는 혼자서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할 것이니, 너는 네 마음껏 즐겨라.” 그러나 이것도 헛된 일이다. 2  알고 보니 웃는 것은 ‘미친 것’이고, 즐거움은 ‘쓸데없는 것’이다.3  지혜를 갈망해 온 나는,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고, 낙을 누려 보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렇게 사는 것이 짧은 한평생을 가장 보람 있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4  나는 여러 가지 큰 일을 성취하였다. 궁전도 지어 보고, 여러 곳에 포도원도 만들어 보았다.5  나는 정원과 과수원을 만들고, 거기에 온갖 과일나무도 심어 보았다.6  나무들이 자라나는 숲에 물을 대려고 여러 곳에 저수지도 만들어 보았다.7  남녀종들을 사들이기도 하고, 집에서 씨종들을 태어나게도 하였다. 나는 또한, 지금까지 예루살렘에 살던 어느 누구도 일찍이 그렇게 가져 본 적이 없을 만큼 많은 소와 양 같은 가축 떼를 가져 보았다.8  은과 금, 임금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 나라의 보물도 모아 보았으며, 남녀 가수들도 거느려 보았고, 남자들이 좋아하는 처첩도 많이 거느려 보았다.9  드디어 나는 일찍이  예루살렘에 살던 어느 누구보다도 더 큰 세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지혜가 늘 내 곁에서 나를 깨우쳐 주었다.10  원하던 것을 나는 다 얻었다. 누리고 싶은 낙은 무엇이든 삼가지 않았다. 나는 하는 일마다 다 자랑스러웠다. 이것은 내가 수고하여 얻은 나의 몫인 셈이었다.11  그러나 내 손으로 성취한 모든 일과 이루려고 애쓴 나의 수고를 돌이켜보니,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

 

대조번역

NIV

I thought in my heart, “Come now, I will test you with pleasure to find out what is good.” But that also proved to be meaningless(1절).

 

[오늘의 묵상]

1. 혼자서 하는 생각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문장이 다 진리이지는 않다. 

어떤 것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진리의 문장이 있다. 

어떤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반진리의 문장이 있다. 

잠언이나 전도서나 욥기를 읽을 때, 항상 이점을 주의해야 한다. 

전도서의 저자는 인생 무상을 이야기한다. 

자신이 이룬 업적에 대해 다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다 쓸데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이런 허무주의적 생각이 과연 하나님의 온전한 뜻인가? 

하나님의 뜻에 다가가는 생각의 과정으로서 긍정적 지점이 있다. 

그러나 이 생각으로 결론이 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전도서 저자의 생각이 마냥 하나님과 반대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생각을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지점도 본받을 만하다. 

그러나 저자는 정말 특별한 성취를 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확률상 몇 %에 속하는 사람일까? 

궁전도 짓고 큰 세력을 거느려 보기도 하였다. 

0.0001%에 속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보편성을 결여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저자는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경험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 생각의 결론이 더 진리에 부합한다고 믿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그런 논리가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 사람의 경험이 다른 사람의 경험보다 더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경험 중에 누군가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경험이나 말이 있을 수는 있다. 

허무한 생각이 종종 찾아와서 자신의 인생과 삶을 돌아보는 사람들에게 전도서의 저자의 글을 도움을 줄 수 있다. 

아무리 찬란한 성취를 한 사람도 이런 허무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 

나도 도움을 받는다. 

인간 저변에 흐르는 허무의식을 이렇게 명료하게 드러내는 저자가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그것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니 말이다.

 

2. 소명

그럼에도 전도자의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리다. 

하나님은 우리를 허무에서 구출해주신다. 

하나님 없는 인생의 성취가 허무하긴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 자리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다시 불러 내 주신다. 

관리하고 통치하는 자로 불러 주신다. 

소명은 허무로부터의 탈출구다. 

소명을 모르면 허무에 귀속된다. 

그러나 소명을 아는 사람들은 성취 여부와 상관없이, 불러주신 분을 위한 삶을 계속 추구한다. 

부르심을 분명히 할 때, 우리는 다시 용기 내어 출발할 수 있다. 

허무함에 머물지 말고, 그 끝에 불러 주신 분을 기억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허무한 생각을 억지로 막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인생이 별거 없다는 사실은 진리에 가깝다. 

그 별거 없는 인생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쏟아져 들어와야 별거가 된다. 

오늘도 그 부르심을 기억한다. 

 

 

[오늘의 기도]

회의자를 내치시지 않으시는 주님, 

주님 앞에서 회의하고 질문하겠습니다. 

주님을 이해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부르심을 더욱 따르겠습니다. 

나이 들었다고 게을러지거나 허세부리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여전히 눈물로 기도하고, 그 부르심을 위해 여전히 달려나가겠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저의 의지와 결심에 힘을 공급해 주세요. 

 

암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치유하소서.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도우소서. 

 

믿음 없는 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소서. 

그들의 신앙이 다시 자랄 수 있는 기획를 제공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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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12-18_근심이 많아지는 역설  (0) 2024.05.15

2024년 05월 15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에, 13  하늘 아래에서 되어지는 온갖 일을 살펴서 알아내려고 지혜를 짜며 심혈을 기울였다. 괴로웠다. 하나님은 왜 사람을 이런 수고로운 일에다 얽어매어 꼼짝도 못하게 하시는 것인가? 14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을 보니 그 모두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15  구부러진 것은 곧게 할 수 없고, 없는 것은 셀 수 없다.16  나는 장담하였다. “나는 지혜를 많이 쌓았다.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다스리던 어느 누구도, 지혜에 있어서는 나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지혜와 지식을 쌓는 일에서, 나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은 없다.”17  나는 또 무엇이 슬기롭고 똑똑한 것인지, 무엇이 얼빠지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구별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처럼 알려고 하는 그것 또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일임을 알게 되었다. 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고, 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도 많더라.

 

주석

14절. 전도서의 저자는 인생의 헤벨(헛되다)을 ‘바람을 잡는 것’에 비유한다. 이 표현은 전도서 전반부에 9회나 반복된다. ‘바람을 잡다’의 또 다른 번역으로는 ‘바람을 먹다’, ‘바람을 탐하다’이다. 이는 덧없고 얻기 어려운 무언가를 목적 없이 공허하게 추구하는 행동을 뜻한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하나님은 왜? 

인생의 무상함을 말하는 전도자는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솔로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생의 무상함과 만물의 허무함을 말하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있다. 

그의 질문은 하나님에게 향한다. 

하나님은 왜 사람을 이런 수고로운 일, 허망한 일에 묶어 두시는가? 

아무리 지혜를 얻고, 만물을 관찰하고, 지식을 쌓아도 이 질문에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성경 안에서 답을 찾자면, 하나님 탓이 아니다. 

허무함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은 인류가 하나님께 반역했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그것을 아예 모르지는 않았으리라. 

인생 무상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을 탓하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들을 계속 다루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상황, 서로 모순적인 결과… 

전도자가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고 질문하는 것을 높게 산다. 

이 위치, 이 자세, 이 태도가 절실하다.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물러서지 마라. 

복잡하고 역설 덩어리라고 해서 뒤돌아 가지 마라. 

그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 앞에 있으라. 

당장 답이 오지 않더라고, 우주의 근원되신 하나님 앞에서 질문하라. 

 

2.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다.

지식과 지혜가 쌓이면 걱정거리도 사라지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전도자는 그 지혜에 있어서 세상을 호령하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전세계 사람들이 그의 지혜와 업적으로 보기 위해 이스라엘을 찾아왔다. 

그렇다고 그의 번뇌와 고뇌가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다. 

지식이 많고 지혜가 많으면 그만큼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더 어려운 문제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를 그 앞에 가져온다. 

해결이 시원하지 않을 때가 많다. 

쉬운 것들은 이제 가져오지도 않는다. 

경험이 되고, 글이 되고, 정책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일상값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 어려운 문제와 질문만 그 앞에 남게 된다. 

해결하면 할 수록 더 어렵다. 

과학자들이 겪는 경험과도 같다. 

현대의 과학자들이 수많은 지식이 있다고 한들, 우주와 자연의 신비를 다 풀었는가!! 

다 풀 수 있을거라 믿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점점 오리무중이다. 

뉴턴 물리학에서 상대성이론을 거쳐 양자 역학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모순적인 사실들이 서로 자웅을 겨룬다. 

우주의 탄생 이론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저마다 장점이 있으나, 완벽하지 않다. 

나이가 많아지고, 경험도 쌓이고, 지혜가 있다 칭찬을 들어도,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다. 

 

인생이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산을 넘으면 강이 나오고, 강을 건너면 폭풍우가 쏟아진다. 

매 순간이 위기고 두려움이다. 

똑같은 순간이 등장하지 않는다. 

언제나 다른 조건과 상황, 사람들이 나온다.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할 뿐이다. 

 

부담스런 순간이 기다린다. 

과연 이 순간을 잘 감당할 것인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하다. 

내 안에는 이 상황과 문제를 해결할 지혜가 부족하고, 마음의 힘도 부족하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가능하다. 

그 분 앞에서 계속 묻는 자세만은 잊지 않겠다. 

 

 

[오늘의 기도]

질문을 받아주시는 하나님, 

회의하는 자의 목소리를 외면치 않으시는 하나님, 

인생의 많은 문제를 주님 앞에서 다뤄가고 싶습니다. 

전도서의 저자처럼 주님께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탓해서가 아니라, 물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이 진정한 정답과 해답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이 그 모든 질문에 반응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암으로 고통받는 자들, 뇌종양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고쳐주소서. 

아픔과 고통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질문을 주님 앞에서 던지게 하소서. 

그들을 회복시켜주시고, 살려주소서. 

 

다가오는 일정에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풀어가면 좋을지 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를 주시고, 지혜를 주소서. 

주님께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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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2:1-11_즐거움도 헛된 일이다.  (0) 2024.05.16

2024년 05월 10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10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11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12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자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14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로 가슴을 가리고 버티어 서십시오.

15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를 하십시오.

16 이 모든 것에 더하여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드십시오. 그것으로써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17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주석

14-17절. 진리, 의, 복음, 믿음, 구원,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들을 무장시켜 전투를 준비하게 하는 품목이다. 따라서 목록에 특별한 논리적 발전은 없다. 그런데 바울은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 신자들을 파멸하려는 마귀의 온갖 시도를 막는 최고의 방어 수단이라고 설명한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 악마 

악마는 첫째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 

그 공격은 대성공이었고, 사람은 하나님께 반역의 죄를 저질렀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악마의 말을 더 믿었고 수용했다. 

그리고 악마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도 다가와 유혹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악마와 대적했다. 

광야에서 기도 중에 예수님은 성경 말씀으로 악마를 이겼다. 

악마의 실체가 분명히 드러났던 시공간은 “기도 중” 그리고 “광야”였다. 

기도가 대단한 것은 영적 실체들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의식, 성령님에 대한 의식, 그리고 악한 영에 대한 의식이 놓아진다. 

특히 고독한 공간에서의 기도는 더욱 그 의식을 예미한게 한다. 

우리 주변에는 숱한 악마들이 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간계를 부린다. 

사람을 유혹하고, 자신들의 의도대로 조종하려고 한다. 

위력을 가하기보다 사람들이 스스로 그 일을 선택하도록 유도한다. 

스스로 하나님께 대적하는 인간을 만드는 일에 집중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께 대적하게 되었기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려 헤어나오지 못한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좌절감이 극대화된다. 

이들은 이 세상의 통치자들,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달려든다. 

사람들을 대표하고 한 그룹을 대표하는 사람이나 리더십들에게 더욱 집요하게 달려든다. 

 

2. 완전무장

바울은 성도들에게 영적 완전 무장을 요구하고 있다. 

영적인 세계를 설명하는 단어들이 있다. 

진리, 정의, 평화의 복음, 믿음, 구원, 성령님, 말씀…

이런 단어들이 모여 영적인 세계의 그림을 그리도록 돕는다. 

영적 세계를 구성하는 영들은, 삼위 하나님, 천사, 악마, 그리고 사람이다. 

이들은 진리, 정의, 복음, 믿음, 구원, 말씀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한다. 

하나님은 진리와 정의의 체계를 창출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이시다. 

악마는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에 반해 자신의 진리 체계와 정의 체계를 알리려고 노력한다. 

하나님 없이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속삭인다. 

이런 영적 공격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에 포함되는 것이 복음이며 구원이다. 

그리고 그 복음과 구원을 이루는 과정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이 꼭 필요하다. 

이 영적 세계를 이해하고, 영적인 싸움을 싸워 나갈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성도다. 

영적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말씀과 믿음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에 속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다. 

 

누군가 영적으로 영향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내게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자세하고 명료하게 설명을 못했다. 

단순히 정서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했다. 

오늘 본문을 기초로 대답해보자면, 영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는, 말씀과 믿음의 길에서 점점 벗어나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에 대한 개념이 흐릿해지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복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옅어지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악마의 유혹을 이기고 영적인 승리를 이뤄야 할 것이다. 

예수님처럼 현실에 뿌리내리지만, 영적 세계의 그림과 역동을 알고 그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완전 무장을 통해 영적 승리를 이루는 삶을 꿈꾼다. 

 

[오늘의 기도]

영적 싸움을 명하시는 예수님, 

오늘날 악마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치 지도자들, 그룹의 리더십들이 악마의 유혹과 간계에 속아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에서 벗어난 경우가 허다합니다. 

주님, 저희를 긍휼히 여기소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주님의 형제 자매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영적 완전 무장에 이르게 하소서. 

진리와 정의에 속하게 하시고, 말씀과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그 구원을 끝까지 지키고, 더 많은 사람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이끌게 하소서. 

 

주님, 주님을 의지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5월 08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1 자녀 된 이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2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3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하신 약속입니다.

4 또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NIV

Children, obey your parents in the Lord, for this is right. “Honor your father and mother”--which is the first commandment with a promise-- “that it may go well with you and that you may enjoy long life on the earth.” Fathers, do not exasperate your children; instead, bring them up in the training and instruction of the Lord(1-4절).

 

[오늘의 묵상]

오늘은 5월 8일 어버이 날이다. 

오늘 말씀은 어버이 날에 최적화된 말씀이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그분들께 순종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예외가 있다. 

그것은 학대하는 경우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 이것이 학대다. 

자녀를 주님의 가르침으로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하지만, 그 가르침이 도리어 자녀들에게 분노를 들끓게 하고 화를 주체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학대와 매한가지다. 

학대에 대해서는 거부해야 한다. 

문제는 어렸을 때에는 부모가 자신을 학대하고 있는지 사랑으로 훈계하고 있는지 분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하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육아에 참여해야 한다. 

혼자 키우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요사이는 인터넷에 온갖 종류의 육아 상식이 떠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할 거라 믿기도 하지만, 너무 많아서 결정 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나누면서 믿음으로 양육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성인이 된 자녀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고 순종함이 더욱 옳다. 

결국 연세가 있으신 부모님을 돌봐야 할 책임이 자녀들에게 있다. 

돌봄은 직접적일 수도 간적접일 수도 있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다. 

자신의 아이를 돌보듯, 이제 연로하신 부모님을 돌봐야 하는 때가 온다. 

그 순간에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과 존경으로 돌보길 원한다. 

심력과 체력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두 가지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만족스런 돌봄을 실천하기 어렵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순간적인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과 감정에 집중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당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저에게 부모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끝까지 존경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그분들의 육체는 약해지고 그만큼 의지도 약해지기에 그분들을 돌보는 일을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그분들의 삶과 헌신과 희생을 항상 기억하며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기 원합니다. 

그분들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을 떠올립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참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았습니다. 

감사의 마음이 가득한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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