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은 나무/열왕기하

왕하 4:1-7_예언자 수련생의 아내

Creve Coeur 2024. 1. 12. 09:39

2024년 01월 12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 예언자 수련생들의 아내 가운데서 남편을 잃은 어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으며 호소하였다. “예언자님의 종인 저의 남편이 죽었습니다. 예언자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빚을 준 사람이 와서, 저의 두 아들을 자기의 노예로 삼으려고 데려가려 합니다.”2 엘리사가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되겠는지 알려 주시오. 집 안에 무엇이 남아 있소?” 그 여인이 대답하였다. “집 안에는 기름 한 병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3 엘리사가 말하였다. “나가서 이웃 사람들에게 빈 그릇들을 빌려 오시오. 되도록 많이 빌려 와서,4 두 아들만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그 그릇마다 모두 기름을 부어서, 채워지는 대로 옆으로 옮겨 놓으시오.”

 

5 그 여인은 엘리사 곁을 떠나, 두 아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그 아들들이 가져 온 그릇에 기름을 부었다.6 그릇마다 가득 차자, 그 여인은 아들들에게 물었다. “그릇이 더 없느냐?” 아들들은 그릇이 이제 더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기름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7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하나님의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다. “가서 그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그 나머지는 모자의 생활비로 쓰도록 하시오.”

 

주석

1절. 만약 한 가족이 어떤 수단으로도 빚을 갚을 수 없는 경우, 그 가족의 몇 사람 혹은 가족 전체가 채권자의 종으로 일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관습이었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예언자 수련생의 죽음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는 예언자를 훈련시키는 학교가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위해 훈련을 받았다. 

단순히 기도만 했다고 볼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과의 역사를 배웠다. 

출애굽의 역사, 가나안 점령의 역사를 배웠다. 

그리고 아합의 시대, 요람의 시대를 배웠다. 

말씀과 시대를 알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다. 

기도만 가지고 자기 맘대로 미래를 예언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가 되는 첫걸음이다. 

 

오늘 본문에서 경건한 수련생이 죽었다. 

그는 결혼도 했고, 아들도 둘이나 있었다. 

제법 나이가 있었지만, 예언자의 삶을 살기 위해 엘리사에게 수련을 받고 있었다. 

경제 활동도 해야 했다. 

그래서 빚을 졌다. 

수련도 받으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해야 했다. 

풍족한 삶은 아니었다. 

그러나 엘리야와 엘리사를 보고 따랐던 그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경건한 예언자가 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내와 아들 둘을 두고 죽고 말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경건하다고 죽지 않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아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죽지 않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온다. 

 

언제든 찾아 올 수 있는 죽음 앞에 겸손해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 오든, 가까운 사람에게 오든, 슬픈 일이지만,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 너머 주님께서 안아 주실 것을 소망하면서… 

 

2. 노예로 삼는 풍습 

누군가가 빚을 지고 갚지 못하면, 그의 자녀들을 노예로 삼는 풍습이 이스라엘에게 있었다. 

원래 취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냥 가난한 상태로 방치하면 정말 굶어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이 고대사회다. 

하나님은 노예의 삶이라도 생명을 유지하길 원하셨다. 

게다가 율법에서는 노예를 해방시켜주는 정기적인 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특히 희년을 선포하게 되면 땅도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고, 노예의 신분으로부터도 해방되었다. 

일종의 사회 안전망 같은 것이 노예제도였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경우, 수련생의 아내가 겪게 될 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극심한 고통 속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남편의 스승을 찾아간다. 

노예로 삼는 것이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녀들만 노예로 끌려가는 것은 비인간적이다. 

제도적 수정이 필요한 대목이다. 

엘리사가 적극적으로 구조적인, 법률적인 접근을 했어도 참 좋았을 것 같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 풍습 자체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자신이 왕도 아니고, 율법의 법안자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엘리사의 질문은 이상하다. 

집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묻는다. 

사실 여기까지만 읽었을 때는 도무지 감이 안온다. 

엘리사가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추측이 되지 않는다. 

그 집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노예로 끌려가게 생겼으니, 채권자에게 할 말을 가르치거나, 채권자를 직접 만나 이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라고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엘리사는 그런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여인은 기름이 남아 있다고 했다. 

정말 그 집안에는 돈이 될만한 것이 거의 없었나보다. 

기름이 귀하긴 했지만, 기름 한 병으로는 빚을 갚을 수 없었다. 

기름 외에 돈이 될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3. 이웃의 도움 

엘리사는 이웃들에게 부탁해서 그릇을 최대한 모으도록 요청했다. 

그리고 그 모든 그릇에 남아 있던 기름을 부으라고 했다. 

가득 채워진 그릇은 한쪽으로 치우라고 했다. 

그렇게 한 병의 기름은 그들이 모아온 모든 그릇에 가득차게 되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웃들의 그릇이 꼭 필요했다는 것이다. 

큰 항아리가 아니고, 그릇이라는 것도 재밌다. 

대용량의 큰 항아리에 기름을 채웠으면 그들은 부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웃들이 빌려 줄 수 있는 작은 그릇들이 모여서 여인과 아들들이 살아 날 수 있었다. 

이웃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그릇들을 빌렸을지 궁금해진다. 

엘리사의 예언같은 말을 들려주면서 빌렸는지, 아님 그동안 남편 수련생의 행실을 거론하며 빌렸는지, 아님 도와달라 그저 읍소했는지… 

여하튼 많은 그릇을 빌릴 수 있었고, 결국 빚도 갚고 생활비도 얻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적극적으로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 

너무 재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돕고 싶다. 

 

여기서 재밌는 유사점을 발견한다. 

요람 왕은 여호사밧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불러와 계곡에 도랑을 파라고 시켰다. 

오늘 여인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이웃들에게 그릇을 빌려왔다. 

계곡의 도랑은 에돔으로부터 물이 흘러 들어와 모든 가축들과 병사들이 먹고 생존할 수 있었다. 

빌려온 모든 그릇에는 기름이 차고 흘러 여인과 아들들은 빚을 갚고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즉 생존이 가능해진 것이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사람의 생각을 언제나 뛰어 넘으신다. 

 

 

[오늘의 기도]

언제나 살아갈 길을 여시는 주님,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두려워할 일이 아님을 기억합니다. 

주님과 더 깊은 연합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더 깊이 알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죽음 때문에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담담히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죽음이 사명을 가리지 않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이웃의 필요에 언제나 예민해지도록 도와주세요.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이웃의 곤경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런 공동체가 되는 일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