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14편_하나님이 없다
2024년 11월 11일 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선한 사람과 그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1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2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을 굽어보시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신다.
3 너희 모두는 다른 길로 빗나가서 하나같이 썩었으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한 자냐? 그들이 밥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나 주를 부르지 않는구나.
5 하나님이 의인의 편이시니, 행악자가 크게 두려워한다.
6 행악자는 가난한 사람의 계획을 늘 좌절시키지만, 주님은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신다.
7 하나님, 시온에서 나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그들의 땅으로 되돌려 보내실 때에, 야곱은 기뻐하고, 이스라엘은 즐거워할 것이다.
ESV
There they are in great terror, for God is with the generation of the righteous(5절).
[오늘의 묵상]
시인의 관찰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이 왜 없겠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주지 않고, 기본적인 배려를 몸에 장착하고, 기부 행위를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영성적이지 않은 사람 중에 도덕적인 사람이 별로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서 영성적이라 함은 자신을 성찰할 수 있고, 자기 자신보다 더 큰 가치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자기 중심성을 극복하려는 특성이라고 정의 내리겠다.
그런 영성적 사람들은 바른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공공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헌신하는 것을 높은 가치로 둔다.
하나님이 없다하면서 영성적인 삶을 아예 거부하는 자들 중에 도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시편 기자가 살던 시기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영성적인 삶을 거부했다는 의미이다.
그 시대는 모두가 하나님을 인정하던 시기였으며, 이방인들조차 신적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이 없었다.
신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반항적이며 반사회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들은 바른 일보다는 썩어빠진 일들에 관심을 둔다.
사회를 병들게 하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온 우주의 통치원리와 법칙이 있으며 그 법칙을 관장하는 인격적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개인에게 엄청난 자체력과 통제력을 심어 준다.
게다가 그 인격적인 존재가 나와 우리 공동체에 대한 모종의 목표와 목적을 심어준다면, 그것으로 삶의 형태와 방식이 송두리째 변화된다.
하나님은 의인의 편이시다.
악인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어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아야 자신의 삶을 죄책감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가난한 사람, 연약한 사람들을 자기 맘대로 주무르고 폭행하고 강간하고 살해하려면 우주의 통치자, 심판자를 부인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 편이시다.
하나님의 편애를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체이시자 성육하신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아이들과 여인들, 죄인이라 낙인 찍힌 사람들과 교제하시고 그들 곁에 계셨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편애하신다.
조금이라도 부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편애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의 편애를 자기에게로 투영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는 대리 통치자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변호사는 하나님의 선지자에 가까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의 잇속을 채우는 데 급급하다.
자본주의가 그를 부추긴다.
가난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하나님의 편애를 받아도 자본주의의 저주 속에 헐떡인다.
때로 하나님의 사랑이 현실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경험하는 사람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찾아오시는 삼위 하나님의 현존을 가장 실감하는 사람들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부자가 되는 순간 삼위 하나님의 현존감이 약해진다.
그것은 그들 마음이 부해지기 때문이다.
돈이 그들의 영적 감각을 무디게 한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 곁에 계신다.
[오늘의 기도]
제가 가난할 때, 실제 먹을 것이 별로 없었을 때, 그 때 주님을 더 깊이 느꼈습니다.
매일 맛있는 식사를 먹으며 고기로 배를 채울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주님을 느끼기가 힘듭니다.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주님이 어떤 말씀을 주시는지 분별이 잘 안됩니다.
그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잘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우선적으로 듭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물질은 과거보다 많아졌으나 영혼은 과거보다 빈약해졌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불편합니다.
계속 베풀어야 하는데, 그렇게 물질이 풍족하지도 않고 품이 넉넉하지도 않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