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9:1-10_사울의 등장
2025년 02월 06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고 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비엘이고, 할아버지는 스롤이고, 그 윗대는 베고랏이고, 그 윗대는 아비아인데, 베냐민 사람이다.
2 그에게는 사울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 없었고, 키도 보통 사람들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
3 그런데 사울의 아버지 기스는 자기가 기르던 암나귀들 가운데서 몇 마리를 잃고서, 자기 아들 사울에게, 종을 하나 데리고 가서 암나귀들을 찾아 보라고 말하였다.
4 사울은 종을 데리고 에브라임 산간지역과 살리사 지방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사알림 지방까지 가서 두루 다녀 보았으나 거기에도 없었다. 베냐민 지방도 다녀 보았으나 거기에서도 찾지 못하였다.
5 그들이 숩 지방으로 들어섰을 때에, 사울이 자기가 데리고 다니던 종에게 말하였다. "그만 돌아가자. 아버지께서 암나귀들보다 오히려 우리 걱정을 하시겠다."
6 그러자 그 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성읍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한 분 계시는데, 존경받는 분이십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그리로 가 보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혹시 그가 우리에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줄지도 모릅니다.”
7 사울이 종에게 말하였다. “그래, 한번 가 보자. 그런데 우리가 그분에게 무엇을 좀 가지고 가야겠는데, 우리 주머니에는 빵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구나. 우리에게 뭐 남아 있는 것이 좀 있느냐?”
8 종이 다시 사울에게 대답하였다. “아, 나에게 은전 한 푼이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리고, 우리가 갈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겠습니다.”
9 (옛적에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할 때에는, 선견자에게 가자고 말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예언자'라고 하는 이들을 옛적에는 ‘선견자’라고 불렀다.)
10 사울이 종에게 말하였다. “좋은 생각이다. 어서 가자!”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성읍으로 갔다.
주석
2절. 고대 근동 사람들은 왕의 신장과 외모를 매우 중시했다(IVP 성경배경주석)
6절. 사울이 사무엘을 모르는 듯이 보이는 것은 사울이 영적, 정치적으로 고지식함을 나타내는 듯하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왕 후보자 사울
베냐민 지파 출신, 유력한 집안의 아들, 출중한 외모의 소유자, 사울이 등장한다.
베냐민 지파는 사시시대 후반부에 다른 11지파와 전쟁을 벌였고,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던 지파였다.
가까스로 지파의 생존이 보장되었고, 조심스레 지내야만 했다.
그래서였을까, 사울은 사무엘을 잘 모르는 눈치다.
도리어 사울과 동행한 종이 사무엘에 대해 알고 있었다.
성경배경주석은 사울이 사무엘을 잘 몰랐던 것은 그의 ‘영적, 정치적 고지식함을 나타내는 듯하다’고 추측하고 있다.
오늘 본문만 두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본다.
사울의 아버지 기스는 유력한 사람, 즉 돈도 있고 영향력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앞으로 후계 구도에서 큰 이점이 있었다.
특별히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도리며 유익이다.
암나귀들 중에 몇 마리를 잃었다고 적혀 있는데,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 도둑맞지 않았을까 싶다.
그냥 암소 몇 마리가 우리에서 벗어나서 사라지는 것이 자주 일어나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두 사람만으로 암나귀들을 찾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도 잘 모르겠다.
좀더 사람을 붙여서 대대적으로 수색해야 되지 않을까!
둘 만으로 근처 지역을 다 둘러보면서 수색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4 사울은 종을 데리고 에브라임 산간지역과 살리사 지방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사알림 지방까지 가서 두루 다녀 보았으나 거기에도 없었다. 베냐민 지방도 다녀 보았으나 거기에서도 찾지 못하였다.
헛수고였다.
그 넓은 지역을 둘이서 수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울과 그의 종은 신실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했다.
암나귀들을 찾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를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가 자신들을 걱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돌아갈 마음도 먹었다.
그것도 아주 센스있는 생각이었다.
많은 설교자들이 사울의 됨됨이를 보고 하나님이 왕으로 세웠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많다.
강하게 반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의 됨됨이나 외모 때문에 그를 왕으로 선택했다는 말에 무조건 동의하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에 가깝다.
잘 생긴 사람이 사울 하나만이었을까?
부모에게 순종한 사람이 사울 하나만이었을까?
꼭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울보다 더 멋지고 더 훌륭하고 더 리더십도 있는 사람이 왜 없었겠는가?
사울은 사무엘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럴 수가 있는가?
미스바의 대 성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블레셋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사무엘을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
사울은 바깥 세계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 걸까?
아버지가 가르침을 주지 않았던 걸까?
세간의 소문에 대한 호기심이 부족했던 걸까?
나에겐 이 부분이 상당히 아쉽게 다가온다.
또 있다.
주인의 아들이면 돈도 가지고 다녀야 할 것 아닌가?
도리어 종은 돈을 가지고 있고, 주인의 아들은 빈손이었다.
사울이 왕이 된 때가 그의 나이 30 혹은 40이란다.
번역마다 다르다.
사무엘상 13:1
개역개정판 -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
새번역판 -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은 마흔두 해였다.
30이든 40이든 당시로는 다 큰 어른이었다.
사리 분별을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고 수색에 필요한 돈도 마련했어야 했다.
이것이 내가 그에게 느끼는 아쉬움이다.
그러니 그의 됨됨이와 순종의 태도 때문에 왕으로 선택되었다고 단정짓기에는 부족함이 보인다.
도리어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믿는 편이 낫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선택하셨다.
에서보다 야곱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그분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결정에 합당한 이유를 찾고 싶어한다.
그 이유를 알아야 불안함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와 원인을 알아야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도 어떤 확실한 원리와 이유가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성경은 그 원리와 이유가 모호하게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요나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보내셔서 회개케하신 하나님은 왜 다른 나라들에게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보내지 않으셨나?
그분의 선택과 결정의 이유를 물어보는 거야 인간으로서 당연한 심리이다.
그러나 완벽한 답을 얻었다고 주장하지 마라.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으로 재단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이성적 판단, 논리적 사고로 예측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도리어 언제나 숨겨져 있고 모호하며 신비롭다.
그분의 선택이나 결정에 수학적 논리가 있다고 말하지 마라.
차라리 양자 역학적 모호함과 신비로움이 있다고 말하라.
그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사실,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고, 지금도 스스로 제한하시면서,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믿어라.
삶의 다양한 결과, 사고와 재해와 죽음에 대해 즉각적인 원인을 찾지 마라.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모든 일의 쓰임은 종말까지 숨겨져 있다.
그러니 거만하게 다 아는 척 말하지 마라.
[오늘의 기도]
신비로운 하나님,
사울의 선택을 사울의 됨됨이로 풀이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하나님의 선택과 결정을 마치 이성적으로 다 풀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도 벗어나게 하소서.
물론 최선을 다해 자기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거대한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쉽게 단정짓지 않게 하소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기다리는 존재가 되길 원합니다.
신비로운 하나님,
당신의 신비로 저를 채워주소서.
당신의 신비 속에 들어가 삼위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길 원합니다.
저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더 분명히 드러나게 하소서.
편안한 휴가를 보내고 있습니다.
날이 추워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편안함 가운데 주님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제 삶을 돌아보며 살아갑니다.
다시 없을 이 안식을 즐겁게 보내게 하소서.
주님이 제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게 하소서.
기도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하소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