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4:10-12_하나님 나라의 비밀
2024년 07월 26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법도를 사모합니다. 주님의 의로 내게 새 힘을 주십시오.
10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에, 예수의 주위에 둘러 있는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그 비유들이 무슨 뜻인지를 예수께 물었다.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12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대조성경
메시지 “그들은 눈을 떴으나 하나도 보지 못하고 귀가 열렸으나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며 돌아서지도 않고 용서받기도 거부한다.”(12절)
[오늘의 묵상]
# 비유의 목적
예수님이 혼자 계실 때가 있었다는 사실이 큰 안심이 된다.
계속 사람들에 둘러 쌓여 있다면 그것도 정말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혼자 계실 때가 있으셨다.
혼자 기도 하러 산에 가신 적도 있으셨다.
혼자 조용히 뭔가에 집중하실 때도 있으셨다.
나도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
오롯이 생각으로만 둘러쌓여 있는 시간.
다양한 생각과 상상으로 구름을 오간다.
물론 예수님의 개인 시간과 내가 보내는 개인 시간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혼자 계셨다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여전히 있고, 제자들도 있었다.
제자들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정확한 메시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어떤 의도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
비유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다.
메시지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함, 메시지를 더 잘 기억하게 하기 위함도 그 중에 들어있다.
예수님의 목적은 예상치 못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숨겨졌지만, 제자들에게는 드러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있단다.
바깥 사람,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는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의뭉스럽고 신비롭기만 한 것일 뿐이다.
분명하지 않으니, 그들은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기를 끝내 거부한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알려진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
야속하다.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그냥 모든 사람들을 동시에 자동적으로 구원하시면 안되나?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나?
그냥 통 크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면 안되나?
이게 하나님,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할 때 가장 큰 방해물이다.
구원받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다.
몇 %인지 모르지만, 최소한 100%는 아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에서 멀어진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여전히 배척하고 무시하고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니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 범죄자에 대한 무조건적 무죄선고를 의미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의미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희생을 포함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따라서 조건적이다.
당신의 희생과 자기 부인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었기에 당신의 사랑이 실질적으로 효력을 발생했다.
그만큼 죄인을 받아들이는 것, 당신을 반역하는 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죽음만큼 힘든 일이었다.
죽기를 각오해야 죄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각오해야 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죄가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는 하나님을 죽였다.
교만의 죄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를 섬겼던 죄가, 그 죄가 하나님을 죽였다.
야속하다고만 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야속할 일이 아니라 창피해야 할 일이다.
염치.
뻔뻔함이 도가 지나쳐 하나님의 결정에 딴지를 건다.
그토록 무조적인 사랑을 갈망한다면, 그대가 한번 해보라.
정말 누군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심지어 자신의 자녀들까지도 그럴 수 있는가?
그런데 하나님께는 요구한다.
단 한 명의 인간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라고 하나님께 윽박지른다.
하나님이 그 사랑을 표현했음에도 자신의 죽음으로 표현했음에도 왜 그렇게 하냐고 질타한다.
그냥 영원히 살게하지 왜 십자가라는 장벽을 만들었냐고 꾸중한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어찌 다 이해하고 다 알겠는가?
그저 내 인격과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의 마음에 이입해서 상상하는 것 뿐이다.
“에라이 이놈들아, 그래서 나를 반역한 자들을 위해 그들의 구원을 위해 내가 대신 십자가에서 죽었잖나? 그 이상 나에게 뭘 바라니?”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분의 죽음을 인정하고 그분을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
비유로 말하시는 것도 그분의 자유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거부하는 자를 어찌 영원히 살게 한단 말인가?
하나님은 그렇게까지는 안 하신다.
십자가가 그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이 안하시는 것, 못하시는 것이 하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자를 구원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사랑 표현을 거부하는 자를 영원히 자기 옆에 자기 안에 연합시키는 일이다.
영원히 자기 옆에 자기 안에 연합시키는 일, 이게 구원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저는 예수님을 통한 당신의 사랑을 믿습니다.
그 십자가의 희생이 저를 영원한 구원으로 이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떨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영원한 동행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게 저의 세계관입니다.
제 삶의 목적이자 의미입니다.
저의 사랑의 고백을 들어주소서.
저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받아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